로마서(4)부르심을 받아 보내심을 받은 사도
(롬1:1)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왜 사람들은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그림 같다는 말을 할까요?’ 언젠가 그림을 그리는 제자가 제게 했던 말입니다. 그림이 허상이고 풍경이 실제임에도 우리는 풍경보다 그림을 더 가치 있게 취급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유사가 본질을 구축하는 형국입니다. 무엇이든지 형식화 하여 ‘나’라는 나라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여 소유함으로써 오로지 자신의 나라를 살찌우는 데에만 총력을 기울이며 사는 인간들의 죄 성이 그대로 나타나는 그런 표현입니다. 인간들은 그렇게 혼돈으로 변화로 감지가 되는 것,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 형식화하고 고정화하여 자신의 울타리에 가두어 거기에서 안정을 찾고자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거하는 장소를 우상화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매주 예배당에 오셔서 지난주와 꼭 같은 자리에 앉으시는 것이 바로 그러한 장소의 우상화, 장소의 고정화의 모습인 것입니다.
(사5:8)
8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인간은 빈틈, 즉 더 차지할 곳이 없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늘려나가 땅 가운데에서 홀로 대장이 되어 살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화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 자리 고정화, 고착화의 삶을 추구하며 그곳에서 안정을 구하는 불안한 인간들의 본능적 죄 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천국도 자기들의 행위를 근거로 형식화 해 버립니다. 천국이라는 장소에 대해 듣기는 들었는데 거기가 어떤 곳인지 잘 모르니까 자신들의 행위를 근거로 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그런 곳을 그리며, 자신들의 힘으로 그곳을 쟁취할 수 있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그러한 제한과 형식화로 모든 것을 자기 존재를 살찌우려하는 인간들의 죄 성은 하나님마저도 성전에 가두려 하지요? 그게 천국이라는 장소를 우상화하여 자신들의 행위로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고 형식화해 버리고 고정화해 버리는 인간들의 죄 성의 발현이었던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어찌 내가 인간이 지은 집에 가두어 질 수 있겠느냐?’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형식화와 고착화의 노력은 역사 전체를 관통하며 인간의 보편적 특징으로 들켜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짜 실물의 풍경보다 그림이 더 가치 있게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풍경은 자기 안에 그림으로 형식화 되어 소유가 가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풍경은 내 안에 가둘 수 없어 버거운 존재가 되는 것이고 형식화시켜버린 그림이나 사진 속의 풍경이 더욱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모습이 아닐 수 없지요? 맞습니다. 그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건 엄밀히 말해 현실을 버거워 하는 인간들의 가상현실의 추구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인간들의 그러한 형식화와 고정화에서 비롯된 가상현실의 추구가 천국에 대한 소망이라는 이름으로 멋지게 둔갑하여 마치 훌륭한 신앙인의 지표로 삼아지고 있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함입니다.
제가 제자의 그 말을 들으면서 떠 올린 사람이 미디어 아트의 대가인 제프리 쇼였습니다. 현존하는 미디어 아티스트 중 최고의 찬사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현존하는 사람이지만 이미 미술사 책에 그의 이름과 작품이 기록이 되어 있을 만큼 그는 탁월한 작가입니다. 제프리 쇼는 아티스트라기보다 과학자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그의 작품 ‘Legible City(읽을 수 있는 도시)’는 관객이 자전거를 타고 그의 작품 속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 방식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관객은 자전거를 타고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여러 도시를 구석구석 구경하고 탐험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짓궂은 관객이 자전거를 탄 채로 벽이라도 들이받을라치면 그만 몸이 벽을 통과해 버리고 맙니다. 그 사람은 순간 육체에서 벗어나 유령이라도 된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는 이내 자신의 신체가 작품 속에 있다는 현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자신의 신체의 현존을 자각하면서 그 사람은 자신의 신체로 돌아오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관객은 제프리 쇼의 작품 속에서 여행을 하면서 자기의 신체에서 벗어나는 체험을 하다가 다시 신체로 돌아오는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신체와 현실을 벗어나서 가상의 공간을 체험하게 되는 것을 가상현실, 혹은 그보다 더 발전한 증강현실, 혹은 혼합현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미디어 아트를 상업용으로 사용하여 큰 성공을 이룬 것이 닌텐도 위(nintendo wii)입니다. 소비자가 게임기 속으로 들어가서 볼링도 하고, 테니스도 치고, 춤도 추고, 전쟁도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을 움직여 가며 가상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 운동도 하고 놀이도 즐기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한 첨단의 게임기가 탄생하게 된 단초 인물이 바로 제프리 쇼입니다. 제프리 쇼는 이제 21세기 이후의 인류는 pata physical species, 즉 과학과 은유가 뒤섞인 상태, 현실과 가상이 뒤섞인 상태를 사는 존재가 될 것이라 말을 했습니다. 그건 은유(metaphor)와는 조금 다른 것입니다.
포탄이 떨어지고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쟁터가 현실이라면 장기판 위에서 장기 알을 가지고 이리저리 달리며 전쟁을 하는 것은 은유(metaphor)입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 장기판 위에서 작은 사람들이 진짜 전쟁을 하는 것을 파타포(pataphor)라 하는 것입니다. 헤리포터라는 소설 속에서 헤리포터 일행이 체스판 위에서 움직이는 체스 말들과 일전을 치르는 그런 장면을 떠 올리시면 이해가 쉬우실 것입니다. 루이스 캐럴이 그러한 파타 피지컬을 소재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는 소설을 쓴 것입니다. 이제 인류는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 혼합현실 속에서 진짜 현실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가짜가 진짜가 되고 진짜가 실종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영화 메트릭스가 실제 우리의 삶 속에서 현실이 될 것이라는 거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인간이라는 종자들이 가상현실 속에서는 재미있게 즐기던 것을 현실 속에서 던져주면 손사래를 친다는 것입니다. 가상현실 속에서 열심히 몸을 이리 저리 움직여 가며 자동차 경주 게임을 하고 있던 남편에게 장거리 운전을 시키면 짜증을 냅니다. 가상현실 속에서는 밥도 안 먹고 심지어 밤까지 새면서 열심히 운전을 하던 사람이 현실 속에서 운전대를 쥐어 주면 짜증을 낸단 말입니다. 가상현실 속에서 열심히 적군을 찾아 방아쇠를 당기던 아이에게 군대 영장이 나오면 어금니를 뽑던가, 팔을 뽑던가, 검지 손가락을 자르면서까지 군 면제를 받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인간들은 그렇게 진짜 현실에서는 자꾸 탈출을 하고 탈주를 하려하고 가상의 현실 속으로 숨으려 합니다. 그러한 현상은 제프리 쇼의 예언처럼 21세기 이후에 나타날 현상이 아니라 이미 아담 안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이 그때부터 살던 삶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차압당한 뒤, 저주 아래에 놓여진 이 세상에서 pata physical species로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이 세상의 현실이 인간들에게는 버겁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역사와 현실을 형식화하고 조작을 하여 그 속에서 안정을 찾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들의 추구는 그들의 마음속에서도 들켜집니다.
조금 더 나아가 볼까요? 지금 여러분 가슴 속에 곱게 감추어둔 그리움이나 추억을 하나씩 꺼내 보세요. 너무 아름답고 가치가 있지요?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게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인지 몰랐잖아요? 그래서 더 아련하고 아쉽고 그런 거지요? 그 말은 그러한 그리움이나 추억이 지금 이 순간 여러분에게 현실로 주어진다 해도 여러분은 그때와 똑같이 그 순간을 가치 있게 여길 수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리움에 울고 추억 속에서 아파합니다. 실제로 그립고 그립던 것을 진짜 현실 속에서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정말 그렇게 좋던가요? 그리고 그 좋음이 얼마나 지속이 되던가요? 왜 인간은 그리움이나 추억을 현실보다 더 크게 가슴 속에 인식하게 되는 것일까요? 역시 자기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경험을 형식화하고 고정화 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움과 추억은 항상 현실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 세상은 아담의 타락이후에 하나님의 저주 아래 던져졌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사망으로 치닫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현실 속에서 늘 사망의 증상들을 접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로 가시와 엉겅퀴만 내는 땅의 현실과 질병과 늙음과 변화와 혼돈이라는 썩어짐의 과정들을 목도하면서 인간들은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림 속의 풍경에는 나타나지 않는 벌레와 진드기와 송충이와 짐승들의 배설물을 현실 속에서는 눈으로 확인하고 경험을 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진짜 풍경보다 그림이 더 좋은 것이고 진짜 현실보다 가상의 현실이 더 좋은 것입니다. 결국 인간들이 자꾸 가상의 현실에 더 가치를 두고 그 가상과 유사 속으로 숨으려 하는 것은 더러운 죄와 죄의 증상들과 결과물들이 현실 속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기들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것들을 다 치워버리고 털어버린 뒤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들로 형식화 해버린 가상의 그림과 가상의 현실 속으로 수시로 도망가 버리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들이 그렇게 자기들이 조작하고 형식화 해 놓은 세상을 진짜로 착각을 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은 본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각자가 상정한 가짜 세상을 살면서 엉뚱한 상을 보며 사는 것입니다. 그걸 성경이 ‘눈이 멀었다, 소경이다, 어두움 속에 산다’라고 합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빛이 찾아오는 것을 부르심이라고 하고 그것을 다른 말로 구원이라 합니다. 어두움 속에서 진짜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들이 형식화 하고 조작한 혼합의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빛이신 예수가 찾아오셔서 눈을 열어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로 내 동댕이쳐 버리는 것입니다. 게임 그만하고 현실을 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렇게 눈이 열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제일 먼저 들어오게 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죄입니다. 인간들은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들 스스로 ‘신’이 되어 버린 후에 자신들의 가치를 챙기기 위해 자신들의 더러움과 그들이 집단적으로 배설해 놓은 더러운 오물 같은 역사를 선하고 아름답게 위장하기 바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역사 낙관론이니 역사 진화론이니 너스레들을 떨면서 신이 된 인간의 위상을 한껏 찬양하며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어떤 무리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은혜가 떠난 피조 세계의 실상을 똑바로 바라보게 하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입에서 ‘아멘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그 ‘부르심과 보내심’에 대해 공부를 할 것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파울로스, 작은 자’로 편지를 시작한 사도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를 한 후 자신은 ‘부르심을 입었다’는 말을 연이어 붙이고 있습니다. 부르심을 입었다는 말은 자기 자신의 자발성을 전부 부인하고 부정하는 말입니다. 누군가 불러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여전히 있지 말아야 할 장소에 있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자신은 보내심을 입은 사도라고 합니다. 사도라는 말 자체가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그 말도 역시 누군가가 자신을 보내지 않았다면, 다른 말로 사도로 임명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절대 그곳에 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내용을 함의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부르심이라는 말과 보내심이라는 말 모두가 인간의 가능성과 자발성을 부정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바로 그 단어들을 끌어다가 자신을 소개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사도 바울이 사도로, 보내심을 받기 위해, 부르심을 받는 장면으로 가보겠습니다.
(행9:1-9)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 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 하니라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예수님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잡아 가두기 위해 기세가 등등하여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열심을 부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자들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요12:39~40)
39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눈이 멀었다’ 예수를 구세주로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은 눈이 먼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진짜 빛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의 눈이 멀어 버립니다. 그 말은 그동안 바울이 보던 세상은 진짜 세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세상을 진짜 세상으로 바라보던 바울의 눈은 사실은 멀어 있었던 것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눈이 먼 자들은 필연적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된다고요? 예수를 핍박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핍박하는 삶이란 어떤 삶을 말하는 것일까요? 인간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 공로만을 의지하여 존재가 되고,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절대 의존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예수를 핍박한다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과 세상의 가능성을 의지하는 것을 예수를 핍박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작년에 세상을 떠난, 번영의 신학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오럴 로버츠나 수정 교회의 로버트 슐러, 긍정의 힘의 조엘 오스틴 같은 사람들은 예수를 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를 핍박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빛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바로 그러한 어두움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그 어두움의 세계에서 눈이 멀어 살던 자들을 빛의 세계로, 다시 말해 은혜의 세계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그걸 부르심이라 합니다.
그렇게 성도에게 찾아와 성도를 어둠 속에서 건져내는 은혜의 빛이 처음 등장하는 곳이 창세기 1장입니다. 거기서부터 출발하여 사도행전 9장의 사도 바울의 부르심의 장면까지 달려가면 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없음의 자리로 밀려 내려가게 되는지 잘 알게 됩니다.
(창1:2-5)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하나님께서 창조를 시작하시는데 그 배경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입니다. 어두움이라는 말입니다. 그 어두움에 빛이 비추는 것이 창조의 시작입니다. 그 일이 지금 사도 바울의 인생 속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눈이 멀어 어둠 속을 헤매던 사도 바울에게 빛이신 주님이 찾아오셔서 그를 부르시고, 그를 새롭게 창조해 내는 구원의 이야기가 창세기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도 바울의 부르심의 사건은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어떤 한 무리에게 일어날 일의 작은 모형인 것이고요.
창세기 1장에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뿐이던 세상에 빛이 비치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제일 먼저 어두움이 빛에서 나뉩니다. 그 말은 숨어있던 어두움이 빛에 의해 어두움으로 발각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빛의 반대편으로 분리가 된 그 어두움을 밤이라고 부르십니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 기억하시지요? 예수님이 잡히시던 때도 밤이었고,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위해 나갔던 때도 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온 세상이 세 시간 동안 밤이 되었던 것도 머릿속에 잘 넣어 두세요. 그렇게 밤은 빛과 낮을 대적하는 개념인 것입니다. 그 위에 빛이 비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빛은 어두움을 빛에서 분리시키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셋째 날에 창조가 되는 씨 맺는 채소들을 키워내는 능력을 갖고 있는 빛입니다. 채소는 태양 빛을 받아 광합성을 해야 비로소 생육이 가능한 것인데 그 태양은 넷째 날 창조가 됩니다. 그런데도 셋째 날 창조된 채소는 태양이 아직 없는 데도 존재가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그 셋째 날의 채소들은 태양의 빛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의 원형인 첫째 날의 그 빛에 의해 존재하고 자라는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렇게 어두움을 분리시켜 갈라내고 이 세상 만물을 존재케 하시고 생육케 하는 그 빛은 무엇일까요?
(요일1:5)
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딤전6:15-16)
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 지어다 아멘
보시다시피 만물을 밝히시고 만물을 존재케 하시는 빛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두움과 절대 섞일 수 없는 빛이십니다. 그리고 그 빛에 의해 만물이 존재하고 유지됩니다. 만물에 그 빛이 비추일 때 비로소 만물은 존재와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첫 창조 때 빛이 먼저 등장하는 것입니다. 빛은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영광이며,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빛이 모든 창조의 첫 머리에 등장한다는 것은,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에 의해,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하여 창조가 될 것이며, 그 창조는 어두움을 갈라내어 밀어내 버리는 창조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게 창세기 첫 창조 때의 빛입니다.
그런데 민수기로 가면 그 빛을 하나님의 얼굴이라고도 합니다.
(민6:22~27)
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3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보시다시피 민수기에서는 하나님의 빛을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이 얼굴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파님’입니다. 히브리어 ‘파님’은 ‘임재’라는 뜻을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창세기 3장 8절에서 그대로 쓰여 집니다.
(창3:8)
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 하나님의 낯을 피했다고 하지요? 그 낯이 바로 ‘파님, 임재, 빛’입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는 지금 범죄를 저지른 후 빛을 피해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바로 그 죄악의 상태를 성경이 뭐라고 묘사를 하는지 보자고요.
(사59:9-10)
9 그러므로 공평이 우리에게서 멀고 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두움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 행하므로
10 우리가 소경 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 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같이 넘어지니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은지라
성경은 타락한 인간 세상을 흑암, 어두움이라고 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을 소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두움 속에 갇혀 버린 소경들이 빛이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요1:1-5)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 하더라
그렇게 하나님의 낯을 피해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 버린 인간들이 제일 먼저 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들을 지켜 줄 안전한 성을 쌓은 것입니다. 가인의 에녹성, 그 후에 지어진 바벨 성, 그 모든 것들이 타락한 인간들의 자기 자리 고정화, 고착화, 형식화의 노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를 통하여 이 세상 모든 자들을 건축자들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은 자기 자리의 고정화와 안정화를 위해 각자 자기의 성을 건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로 소경입니다. 풍경을 보고 그림 같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빛을 비추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아의 나라에서 끌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이 자신들의 추구가 얼마나 더럽고 추하고 무모하고 추악한 짓인지를 먼저 볼 수 있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예수라는 빛에 의해 눈을 뜨게 된 자들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이 이 세상의 추악함이며 자기 자신 속에 숨어 있던 죄인 것입니다.
(사42:6~7,16)
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7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 오게 하리라
16 내가 소경을 그들의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의 알지 못하는 첩경으로 인도하며 흑암으로 그 앞에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
여기에서 ‘너’는 성자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빛으로, 이 어두움의 세상으로 보내셔서 흑암에 갇혀 소경으로 살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내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무엇을 성취하시겠다는 것입니까?
(사60:1-3,19-22)
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 하였음이니라
2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19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영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20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영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마칠 것임이니라
21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영히 땅을 차지하리니 그들은 나의 심은 가지요 나의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22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다시는 태양이 빛이 되지 않고 달이 빛이 되지 않는 그런 세상, 다른 말로 인간들이 의지하고 있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 첫 창조의 모형들이 싹 사라지고, 원형이, 실체가 서게 되는 진짜 빛의 세계를 완성하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그 나라에 집어넣으시기 위해 성자 예수를 빛으로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들의 육적 기대와 욕망과 의지를 부수시고 진짜 실체를 드러내시기 위해 빛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 나라가 이렇게 완성이 됩니다.
(계21:23)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보세요. 첫 창조에 속한 모형으로서의 빛의 발광체인 태양이 없어지고 빛의 원형이신 하나님의 영광과 어린 양이 등불이 되어 천국을 비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에 의해 눈을 뜬 자들은 바로 그 천국의 현실을 보게 되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게 하는 힘, 사람을 살게 하는 진짜 가치는 하나님의 임재에서, 하나님의 얼굴의 비췸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가치와 힘은 유한한 것이며 실체가 아닌 유사요 모형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과 이 세상의 가치에서 자꾸 마음을 놓아가게 되는 것이 진짜 눈을 뜬, 부름 받은 자인 것입니다. 인간들이 형식화시키고 조작해 놓은 가상현실, 증강현실, 혼합현실 속에서 빠져나와 이 역사와 우주의 실체인, 어두움을 보게 되는 자가 부르심을 입은 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의 실체를 직면하게 될 때 안타깝고, 슬프고, 외롭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여러분, 왜 성경에 빛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웃으셨다는 말씀이 단 한 절도 기록이 되어 있지 않은지 아세요? 빛이 이 세상의 실체를 올바로 직시하게 되면 구역질밖에 나올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빛에 속한 이가 어두움에 둘러 싸여 사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 것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 이사야서 52장에 나옵니다.
(사52:13~14)
1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14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예수님이 이 세상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보이셨다는 것입니까? 다른 모든 인생들보다 얼굴이 상하고 쉬 늙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른이 갓 넘으신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이 오십도 안 되었거늘, 이라고 한 것입니다. 나이 서른에 오십이 가까운 사람으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빛이 어두움과 섞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상함과 탄식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빛은 이 세상의 어둠을 밝히기 위해 그 자신이 어두움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빛은 더욱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42:18~19)
18 너희 귀머거리들아 들으라 너희 소경들아 밝히 보라
19 소경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나의 보내는 나의 사자 같이 귀머거리겠느냐 누가 나와 친한 자 같이 소경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소경이겠느냐
그렇지요? 하나님께서 보내신 빛이 어두움 속의 소경들과 귀머거리들을 건지는데 어떠한 방식으로 건지시는가 하면 자신이 소경이 되고 자신이 귀머거리가 되셔서 그들을 건지신다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빛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의 첫째 날에 창조된 빛은, 빛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그대로 간직한 채 하나님에 의해 부르심을 입고 보내심을 받은 성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요 8:12)
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9:5)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요 11:9)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예수님이 빛이시고 충분한 기회가 주어졌는데도(낮이 열두 시간) 인간들은 절대 빛을 알아보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빛이 어두움에게 짓밟히는 형국으로 구원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는 그렇게 약한 자가 되고 어두움에 물리는 모습으로 승리를 거머쥐게 된다는 것을 아는 자가 눈을 뜬 자들인 것입니다.
(고후4:6)
6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창세기에서의 그 빛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이 세상으로 출격을 하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것입니다. 그 빛에 의해 이 세상이 창조가 되었고 그 빛 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빛이 우리 마음에 비추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빛은 창조를 하는 것이잖아요? 어둠뿐이던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예수가 빛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비추셨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어두움을 가져가셨다는 것입니다. 빛이 어두움에 짓밟혀 어두움을 빛으로 살려낸 것입니다. 빛의 희생으로 어두움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속성이고 하나님 나라의 존재양식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나올 때 깜깜한 어둠이 애굽을 덮었던 것 기억하시지요? 그 어두움에 빛이 비추게 되자 어두움이었던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빠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빛이 어떠한 방식으로 비추어졌나요? 어린양의 희생으로, 번제단의 제물의 모습으로 비추어졌단 말입니다. 그게 유월절입니다.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불기둥과 구름 기둥도 바로 그런 역할을 한 것입니다.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불이 구름에 싸여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그 불과 구름 속에 있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 불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약속의 땅으로 집어넣으십니다. 그것 또한 새 창조의 모형인 것입니다. 왜 불기둥입니까? 이스라엘이 어두움이니까요.
사도행전 2장에서 교회가 탄생이 될 때 왜 불의 혀가 등장합니까? 어두움이던 자들에게 빛이 임하여 빛으로 끌어내는 사건이 구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빛으로 비추시고는 우리에게도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을 해 버리십니다. 그리고는 빛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엡5:8)
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이게 보내심입니다. 성도는 빛에 의해 어두움에서 나와 다시 어두움에게 먹히는 빛의 삶으로 보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그러한 성도의 삶을 착한 행실이라고도 하고, 빛의 자녀들다운 삶이라고도 합니다.
(마5:14-16)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성도는 이렇게 착한 행실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빛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마16:27)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그런데 이 행함은, 이 착한 행실은 단순히 도덕적, 윤리적 선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요? 각 사람의 행함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바로 그 앞 구절과 붙여서 볼까요?
(마16:25~27)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주님께서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고, 제 목숨을 잃으면 찾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그 행실대로 나중에 반드시 갚아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빛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어떤 삶으로 보내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까? 자기 목숨을 잃는 삶으로 보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빛의 삶입니다. 참 빛이신 예수의 삶이 바로 그러한 삶이었지요?
물론 어두움이 다 사라지게 되었을 때 빛의 삶은 그야말로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하신 때까지 빛과 어두움이 공존하는 기간 동안에는 빛이 어두움으로 인하여 손해를 보고, 당해주고, 작아지는 수난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게 이 세상 속에서의 빛들의 죽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두움 속에서 소경으로 살던 사도 바울에게 빛으로 찾아가셔서 그를 부르신 후 그의 삶이 어떻게 끌려 갈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까?
(행9:15~16)
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빛이 소경인 바울에게 찾아가셔서 그를 어두움에서 빛으로 불러내시는데 그의 삶이 참 빛이신 예수님의 삶처럼 해를 받는 삶이 된다는 것을 천명하고 계십니다.
그게 부르심입니다. 만일 부르심을 입지 않고 예배당에 나와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전혀 이해를 못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우리 인간의 지혜나 노력으로 이해가 되어 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 인간들의 노력과 뜻과 지혜를 완전히 박살을 내어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이 세상의 불가능함과 자신의 더러움에 치를 떨어야 합니다. 그들만이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후서 12장에서 자신의 부르심과 사도직에 대한 변증을 하면서 무엇을 가지고 변증을 합니까? 자신의 약함을 죽 나열하고 그것을 자랑합니다. 그게 내가 부르심을 입었다는 증거이고 내가 사도라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여러분의 약함을, 그리고 부족함을 나열하면서 그것으로 여러분의 자랑을 삼으신 적이 있었습니까? 전부 자기의 강함이나 업적과 행위를 내어 놓고 그것을 자랑하기 바쁘지요? 그게 우리의 실체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가 필요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다 이루었다’잖아요. 반면에 세상 종교의 복음은 뭡니까? ‘계속 정진하라’입니다. 그게 석가모니의 유언이었거든요. 계속 정진하여 무엇을 하라는 것입니까?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신 됨을 입증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게 고정화, 형식화의 틀 속에 갇혀 있는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눈을 뜬 자들은 ‘하나님께서 다 이루셨으므로 우리는 그 은혜를 누리기만 하면 된다’의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왜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일을 나누어 주시지 않으시고 홀로 다 이루셔야 했는지를, 이 역사와 인생 속에서 경험하고 체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웃을 일이 별로 없습니다. 많이 외로울 것이고, 많이 슬플 것이고, 많이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외로움과 고통과 슬픔과 아픔이 소망 속에서, 믿음 안에서 기쁨으로 감지가 되어 질 수 있는 것이 성도의 삶의 역설인 것입니다. 그걸 모르는 자들은 유기된 자들입니다. 자기들이 고정화 하고 형식화 한 가짜 세상에서 ‘여기가 좋사오니’하며 사는 자들은 전부 형벌에 처해질 것입니다.
(살후1:8-9)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9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예수의 복음, 즉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공로를 의지하며, 인간과 인간들의 욕망의 전시장인 이 세상의 불가능함을 인식하지 못하는 자들은 형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의 얼굴과 주의 영광, 즉 빛을 떠나 소경으로 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말4:1~2)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보세요. 똑같은 불이 내려오는데 그 불에 의해 눈을 뜬 자들은, 다른 말로 예수의 십자가 공로를 이해한 사람은 그 빛이 치료하는 광선이 될 것이지만, 여전히 그 빛을 이용하여 자신의 빛 됨을 입증하려 하는 자들은 그 빛에 의해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으세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의지 하십시오. 그리고 왜 우리는 그 피만을 의지해야 하는지, 제발 눈을 떠서 여러분 안에 숨어 있는 죄악의 추악함과 이 세상의 실체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자신과 이 세상에게 자꾸 실망하세요. 그게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다가 어두움에 짓 밟혀 버림으로 어두움을 구원해 내신 예수의 삶이고 빛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성도들의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낮은 자리로 밀려 내려 갈 것이고, 약한 자리로 밀려 내려 갈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의 삶 속에서는 예수라는 빛만이 드러나게 될 것이고, 그게 진짜 빛의 삶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