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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설교원고
2014.03.30 22:57

예수님의 비유9강~1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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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9.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7:21~29)

7:21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7:24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7:25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다.

7: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7:27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치니, 무너졌다. 그리고 그 무너짐이 엄청났다."

7: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니, 무리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7:29 예수께서는 그들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오늘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의 비유에 관해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비유를 너무나 쉽게, 행함이 있는 믿음과 행함이 없는 믿음의 대조로 이해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반석 위에 집은 지은 자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은 지은 자라는 것이지요.

원래는 제가 야고보서의 행함이 있는 믿음과 로마서의 행함을 부정하는 믿음을 예로 들어 좀 더 깊은 설명을 해 드리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아서 그 부분은 다음 시간에 깊이 다루어 드리도록 하고 오늘은 전후 문맥을 중심으로 이 부분을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이 비유는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는 그런 비유가 아닙니다. 29절의 말씀만 보아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지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은 뒤 깜짝 놀라는데 놀라는 이유가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같지 않아서 놀랍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연구하여 율법지킴을 강조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비유는 서기관들의 그 가르침과는 다른 가르침이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비유를 인간의 율법지킴과 행함에 관한 강조로 해석을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이 비유를 잘 보시면 반석 위에도 멋진 집이 지어져 있고, 모래 위에도 멋진 집이 지어져 있다는 것이 이 비유 속에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집의 외형으로만 본다면 어떤 기초 위에 지어진 집이 훌륭한지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 이 비유는 집의 외형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기초에 관한 문제인 것입니다. 쉬운 말로 어떤 행위를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기초 위에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비유인 것입니다.

 

21절로 올라가 보시면 주님께서 성도의 행함에 관해 언급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 행함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행함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행함이 아닌, 다른 행함에 관한 경고입니다. 22절을 보시면, 주님의 심판의 날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읍소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여, 주여라고 부르며, ‘우리가 사는 동안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냈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습니다.’하고 자신들이 행한 일들의 목록을 주님 앞에 제시했습니다. 22절에서의 행하다포이에오이고, 21절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다에서의 행하다포이에오입니다. 그 말은 22절의 악당들이 자신들의 행함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22절의 행함은 주님에 의해 부정당하고, 기각당합니다. 도대체 그들이 뭘 잘 못한 것일까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이 잘못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불쌍한,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준 게 잘못인가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여, 기적과 이사를 통해 연약한 이들을 도와준 게 잘못입니까? 이 모든 것이 전부 오늘날 교회가 열심을 부려가며 추구하며 행하고 있는 것들의 목록 아닌가요? 그런데 왜 주님은 그들의 행함을 불법이라고 못을 박고 계시는 걸까요? 그건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 도대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6:38~40)

38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 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 이니라

40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의 조력자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돕는다든지, 우리의 선한 행실로 아버지를 기쁘게 한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을 믿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로 생명나무 실과를 먹고 영생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의 공로만 의지하고, 예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아버지 앞에 납작 엎드리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게 아버지의 뜻입니다.

 

여러분, 인간과 피조물의 창조된 목적이 뭡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43:7)

7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시고 그것은 절대 먹으면 안 된다, 먹으면 정녕 죽는다.’라고 금단의 열매로 규정을 하신 것은, 인간의 자기 가능성, 즉 자기 영광 챙기기와 자기 가치 챙기기를 애초부터 막아 버리신 것입니다. 인간은 선악을 알도록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선과 악이라는 것을 스스로 판단하여 선악 판단의 주체 자가 되면 안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선하다고 하는 것을 선이라 인정하고, 하나님이 악이라 규정하신 것을 악으로 규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말씀만 열심히 좇아 살면, 가장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먹어 버렸습니다. 그 후로 인간은 선악 판단의 눈이 밝아져서 세상의 모든 사건과 현상과 현실을 스스로의 기준으로 판단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뜻은 전혀 개입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인간 스스로가 선악 판단의 주체 자인 신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즉시 생명나무로 향하는 길을 봉쇄해 버리셨습니다. 그 길은 절대, 선악과를 따먹은 타락한 인간의 힘으로는 들어설 수도, 걸어갈 수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생명나무 실과는 인간 측에서의 그 어떤 노력이나 열심이나 정성으로도 따 먹을 수 없도록, 하늘의 조치가 내려진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이미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버린 인간은, 자신들의 선악 판단의 기준을 가지고, 그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연약함을 폭로 당하지 않기 위하여 갖가지 방어기제를 내어 놓으며 스스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개척하려 시도를 한 것입니다.

그들은 바벨탑이라는 것을 쌓아서 인간들의 노력과 정성으로 생명나무에 도달하려 하기도 했고, 가인의 후예들에서 시작된 문화와 문명이라는 것을 사용해서 지고의 행복, 즉 구원에 도달하려 애를 쓰기도 합니다. 그들은 도덕과 윤리와 사회법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스스로 선함과 악함을 규정하여, 자신들이 선이라고 규정해 놓은 것을 많이 행하는 자들을, 착한 사람, 위대한 성자, 훌륭한 위인, 본받아야 할 사람 등의 이름으로 부르며, 마치 그렇게 사는 자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나무에 도달 할 수 있을 것처럼 확신을 하며 삽니다. 또한 그들은 종교라는 것을 만들어서 그들의 종교적 열심과 종교적 가르침에 의한 선함 등을 통하여 자신들이 꽤 괜찮은 자들인 것처럼 포장을 하여 생명나무에로의 접근을 시도합니다. 이러한 선행체계와 지식체계, 문화와 문명, 그 모든 것들이 다, 타락한 인간들의 방어기제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들이 꽤 기특한 모습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시도와 노력의 어디에도 하나님의 영광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노력과 정성과 열심의 주인은 항상 인간입니다. 생명나무 실과, 즉 영생으로 가는 길은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막혀 있습니다. 아무도 못 들어갑니다. 그 어떤 선행체계, 그 어떤 지식체계로도 그 길은 접근 불가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스스로가 내린 선악의 판단을 기준으로, 그것을 행하고, 행하지 않고의 결과물을 가지고 천국을 침노하려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어떤 선한 행위로도 생명나무로 향하는 길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길이 좁은 길입니다. 그 길은 오직 예수로만 열립니다.

예수님의 공로와 예수님의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만 그 길은 열립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이 하늘 위로부터 땅 아래로 찢어진 것 기억하시지요? 그 휘장에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지 아세요? 바로 생명나무를 지키고 있던 그룹들이 그 휘장에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 그룹들은 지성소, 즉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는 시은좌를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생명나무입니다. 거기는 일 년에 한번, 완벽한 죄 씻음의 결례를 행한 대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곳입니다. 그 외의 모든 접근 시도는 그룹들과 화염검에 의해 차단이 되고 무차별 공격을 당하게 됩니다. 그 무시무시한 곳을 가리고 있던 그룹들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해산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명나무로 가는 길로 들어가 영생의 실과를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그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십자가 피를 믿는 믿음 이외의 모든 시도는 전부 죽음의 시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의 주체가 되어버린 인간은 은혜를 이야기하면 자존심이 상해 화를 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어버린 인간들은 절대 은혜 앞에 항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다가 자꾸 인간의 행함을 보태려 하는 것입니다. 그게 율법과 제사를 열심히 지켰던 바리새인들의 저주받을 의였습니다. 자신들의 열심과 정성과 노력을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지요. 한 마디로 자기 영광 챙기기를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이 내어놓는 종교행위는 전부 자기의 자랑과 자기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토색, 불의, 간음을 행하지 않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했으며, 십일조를 철저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행함이 전부 자기의 의로 쌓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보다 연약한 자들을 향해 거침없이 비판의 화살을 날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저 세리와는 달라요

그들은 말씀을 열심히 공부했고, 그 말씀을 전하기 위해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기적을 행하는 자들도 있었고, 권능을 행하는 자들도 있었으며, 구제나 봉사나 섬김의 착한 일에는 누구보다 앞장을 서는 훌륭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독설을 반복하여 던지셨습니다. 그건 당시에 가장 더럽고 충격적인 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이 그들의 행위에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는 욕을 하셨겠습니까? 왜 그들의 그 착한 행위, 기특한 행위가 그런 평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들의 행위의 모든 목적이 다 자기 영광 챙기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장으로 가서 인간의 행위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도록 하지요.

 

(6:1~6)

1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 하느니라

2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5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이렇게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자신의 영광 챙기기의 일환으로 행하는 모든 착한 일과 종교 행위가 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불법을 행함인 것입니다. 본문 23절을 보세요.

 

(7:23)

23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평생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권능도 행하고, 선행도 했는데 그 모든 것이 다 자신의 영광을 위함이었고, 그 행함을 의지하여 생명나무 실과에 도달해 보겠다는, 패역하고 무식한 시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 많은 행함을 장황히 나열을 하고도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그들이 주여, 주여라고 주님의 이름을 애타게 부른 이유는 자신들에게 주어질 권능과 사역 등에 의한 자기 영광 챙기기의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아무리 애타게 주님의 이름을 불렀다 하더라도 모두 지옥행입니다. 그리고는 그 이야기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반석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7:24)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바로 위에서는 엉터리 행함을 내어놓은 자들에게 저주가 떨어지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이 행함을 내어 놓으라입니다. 그러면 그 행함은 어떤 행함이겠습니까? 도대체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고전10:4)

 

(고전3:10-11)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 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그렇지요? 따라서 그 위에 집을 짓는 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구원의 집은 우리의 행함이나 열심, 노력, 정성 등에 의해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의 터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열심에 의해 지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 가운데서 얻는 구원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의 터 위에, 예수의 집이 지어져야 하는데 거기에 우리의 엉뚱한 못질이 가입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걸 다 태우고 예수로만 구원하시는 것이 불 가운데서 주시는 구원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예수만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반석 위에 짓는 집이라는 성도의 행함입니다.

오직 믿음 위에 서는 집, 예수 위에 서는 집, 예수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과 공로 위에 지어진 집, 그게 진짜 믿음의 집인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이야기하면서도 어줍지 않은 행함이나 공로 들을 내어 놓으면서 그것으로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의 자존심을 챙기고, 자신의 인기와 영광을 챙기려 하는 음흉한 시도들이 교회 안에 여전히 팽배합니다. 그것들이 바로 모래 위에 지은 집입니다. 겉으로는 근사합니다. 전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철옹성처럼 보입니다.

 

여러분이 이 비유를 읽으시면서 누가 모래 위에 집을 짓겠는가?’하고 의문을 가지실지도 모르겠는데, 그건 팔레스타인의 지형과 기후를 잘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팔레스타인에는 와디라는 것이 있습니다. 와디라는 곳은 평소의 건기에는 단단하고 견고해 보여 사람들이 교통로로 쓰기도 하는 그런 곳입니다. 그런데 우기 때 비가 오게 되면 그 와디는 금방 본색을 드러내어 질퍽한 수렁으로 변하고, 심지어 그 와디를 길 삼아 물길이 잡히는 그런 곳입니다. 그래서 비가오고 창수가 나면 그 와디는 물이 흐르는 물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는 것은, 겉으로는 전혀 티가 나지 않는 훌륭한 종교 행위와 감동스러운 착한 일처럼 보이는데, 나중에 심판대 앞에 나아갔을 때, 주님에 의해, 자기 영광 챙기기라는 더러운 외식으로 판정이 되는 그런 행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반석 위에 지은 집은 선한 행위와 열심 있는 종교 행위를 많이 내어 놓는 그런 성도의 삶을 말하는 것이고,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이야기 한다는 식의 성경 해석은 이 비유의 진의를 정면으로 거스리는 해석인 것입니다. 오히려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더 훌륭해 보이고, 더 감동스러워 보이는 행함을 많이 내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행함이 전부 자신의 인기 챙기기, 자신의 만족 챙기기, 자신의 가치 챙기기, 자신의 자존심 챙기기, 자신의 영광 챙기기의 행함일 때, 그들은 그 행함으로 인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석 위에 지은 집은 그 어떤 행함을 내어 놓을 때에도 오로지 예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예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면목 없고, 공로 없는 겸손한 행함을 내어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 있어서 반석 위에 짓는 집은 외려 모래 위에 지어지는 집보다 행함이 덜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깊이를 잘 모르는 이들은 자신들의 행함으로 그 불안함을 채우려는 시도를 하기 때문에 지나친 선행과 지나친 깨끗함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래야 자신의 더러운 좀비 얼굴이 가려지거든요. 자신들의 마음속에서 스스로에게 폭로되는, 더럽고 추악한 모습을 도덕과 윤리와 선행으로 감추어, 지저분한 자신의 모습을 가리려는 시도, 그 모든 것이 다 추악한 인간들의 저주받을 방어기제들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들의 선행과 그들의 종교행위는 모두 외식이었습니다. 자기 가치 챙기기였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해도 길 가운데에서 하고, 금식을 해도 수척한 척, 괴로운 척, 고통스러운 척을 했던 것입니다. 남을 도울 때도 나팔을 불며 했고, 헌금을 해도 남들 앞에서 폼 나게 했습니다. 그러한 선한 행위들이 모두 모래 위에 지은 집이고, 지옥으로 떨어질 불법을 행함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종교적 열심이나, 우리의 선행이나, 우리의 봉사, 우리의 선교, 우리의 구제, 우리의 헌금을 한 번 돌아보자고요. 어떠세요? 그게 정말 여러분의 자랑이나, 여러분의 자존심 챙기기, 자기 가치 챙기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자신하실 수 있으세요? 만일 그렇다면 그게 다 창수가 나면 사라질 모래 위에 지은 집이고, 저주받을 불법일 텐데, 그것으로 눈물 흘리며 하나님 앞에 자복하며 회개하신 적 있으십니까? 하나님께서 보고 싶으신 눈물은 바로 그러한 눈물인 것입니다. ‘왜 나는 이렇게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하고, 이렇게 말씀 공부를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의 가치 챙기기와 나의 영광 챙기기, 나의 자존심 챙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불법을 행함으로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있는 것일까? 정말 나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이런 고백과 함께 내어 놓는 눈물, 하나님은 그 눈물을 보시길 원하십니다. 헌금을 하면서, 진정한 헌금을 하지 못하는 나를 폭로당하고, 구제를 하면서 참된 구제를 행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들키며, 봉사를 하면서도 우쭐대는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낱낱이 폭로 당하는 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이어야 합니다. 절대 그런 행위가 뿌듯하게 다가오면 안 됩니다. 그게 바로 자기부인이며, 그게 바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믿음의 행함인 것입니다.

 

따라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이들의 삶 속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붙들게 하시는 하나님의 폭력적 경륜에 의해, 깨끗하고 선한 행위보다는, 더럽고 추악한 모습이 더 많이 폭로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발각되어진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기 스스로의 힘을 의지하여 생명나무에로의 전진을 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십자가의 피 공로만을 의지하여, 그 그룹들과 화염검을 믿음으로 찢어내는 그 삶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앞에서의 항복, 자기부인, 자기 영광 챙기기에 대한 폭로와 경고 등을 설교함으로 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박살을 내고, 자기 의로 겹겹이 둘려 있는 무장을 해제 시켜버리는 것이 올바른 설교자의 임무인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사람들을 붙들어 두기 위해 인간들의 자존심을 은근히 부추겨 주는 설교를 하여 그들의 에너지와 소유와 열심을 노략질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바로 위에 거짓 선지자에 대한 경고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7:15~20)

15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20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15절을 보시면 거짓 선지자는 양의 옷을 입고 있으며, 그 거짓 선지자의 목적은 노략질입니다. 바로 이 거짓 선지자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여, 주여를 외쳤던 선지자입니다. 그들이 모두 양의 옷을 입었다는 것이 주목할 만한 것입니다. 여러분, 박태선이나, 문선명 같은 사람이 양의 옷을 입은 이리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이리라는 것이 밝혀진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양의 옷을 입은 이리는 어떤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까? 정말 옳아 보이고, 정말 깨끗해 보이며, 정말 정직해 보이는데, 실상은 양들을 노략질하고 있는 그런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노략질이라고 하니까 자꾸 돈을 목적으로 하여, 양들의 재산을 갈취하는 그런 파렴치한 사람들을 떠 올리시는 것 같은데, 진짜 무서운 노략질은 양들의 소유를 갈취하는 정도가 아니라 양들의 생명을 갉아먹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짓 선지자들은 어떻게 양들의 생명을 갉아먹는가? 예수님께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경고를 하신 후에 갑자기 열매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열매로 그들을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그게 어떤 열매를 말하는 것일까요? 구제의 열매? 청빈의 열매? 선한 삶이라는 열매? 그런 열매만 맺으면 진짜 선지자고, 그런 열매를 맺지 못하면 가짜 선지자인가요? 그럼 간디는 선한 선지자 자격이 있는 것입니까? 슈바이처는 어때요? 법정스님, 성철스님은 어떻습니까? 그들도 선지자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열매는 세상 사람들은 내어 놓을 수 없는 특별한 열매입니다. 그게 뭘까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믿음입니다. 그게 열매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자기 긍정을 부인해 버리는 대전제를 함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신뢰하는데 왜 다른 존재를 믿습니까? 믿음은 나라는 존재를 부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에 의해 자기가 부인이 되고, 성령에 의해 그들 속에 맺혀지는 것이 있는데 갈라디아서는 그 열매를 이렇게 세분하여 기술을 합니다.

 

(5:22~23)

22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어떠세요? 여러분 안에 이러한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나요? 자신 없으시지요? 그래서 성령의 열매입니다. 여기에서 성령의는 소유격이 아니라 주격입니다. 성령이 맺으시는 열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의 열매는 예수를 믿는 순간 즉시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될 때, 그 때 완전한 열매로 우리 안에 자리를 잡게 되는 열매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성령의 열매가 열리기 위해서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이, 내가 나의 가치 챙기기의 일환으로 선악의 원리에 입각하여 맺어 놓은 가짜 열매들이 제거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익어가고 완성되어져 가는 그 길에 나타나는 현상은, 자기 자랑으로 내어 놓는 선한 행위들의 소멸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잎사귀만 무성한 외식의 행위들이 은혜의 복음 앞에서 스러져 가고, 그렇게 자신의 의가 부인이 되어져가게 되면 성령이 맺으시는 진짜 열매가 보이지 않게 익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진짜 열매를 맺는 모습은 외부로 드러나는 선한 열심과 부지런한 종교 행위의 감추어짐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게 은혜의 말씀의 위력입니다. 은혜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골수와 관절을 쪼개 버립니다. 가짜 열매, 가짜 행위들을 완전히 폭로시켜 버리고, 포를 떠내 버린단 말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나는 착함이나 열심 등이 감추어지고, 숨어서 행하시는 예수님의 진짜 행함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한 자기부인의 모습은 삼자의 눈에 시험이 든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열심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첫사랑을 잃어버린 모습으로 보여 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 그리고 그 은혜와 긍휼 앞에서의 처절한 자기부인을 가르치지 않고, 이 세상의 성공과 번영을 약속하며, 긍정적 사고니 뭐니 하면서 열심과 충성과 봉사를 강요하는 그런 자들이 바로 양의 탈을 쓴 거짓 선지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열심 있는 종교행위를 강조합니다. 특별 새벽기도니, 금식이니, 천일 제단이니, 하면서 열심 있는 종교행위를 강조하고, 착하게 살자고, 선하게 살자고 눈물 섞인 호소도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열심과 선함의 결과는 항상 인간의 유익으로 결론지어집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의 성공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위해, 우리가 열매를 맺자는 것입니다. 좋은 설교 같지요? 건강한 설교 아닙니까?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우리 성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생을 위해 사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걸 아는 이들은 절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착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기에 착한 일을 합니다. 그걸 아는 이들은 절대 자신의 성공을 위해 백일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위해 기도를 합니다. 그걸 아는 자들은 절대 자신의 가치 챙기기를 위해 구제를 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그 은혜를 나누는 차원으로 구제를 합니다. 그걸 아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 몇 배로 더 복을 받기 위해 헌금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자기 아들 예수의 목숨으로 우리를 위해 헌금을 하셨다는 것을 알기에, 나 자신을 전부 주께 맡긴다는 신앙고백으로 헌금을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진짜 열매를 맺게 하는 예수님의 은혜를 충분히 가르쳐주지도 않고 무조건 착하게 살고, 종교적 열심을 부려 이 세상에서도 인기와 자랑을 챙기고, 이 세상에서도 풍성한 복을 누리며, 천국도 가자는 식의 가르침은 마귀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아직 깊이 체험하여 알지 못하는 이들은 헌금도 봉사도 구제도 다 멈추라고 여러 번 반복하여 말씀을 드린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그럴 때마다 헌금이 줄고, 일할 사람이 줄어듭니다. 교회로서는 손해입니다. 그 손해를 줄이기 위해 은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나 자각도 없는 이들에게 착하게 살고, 신앙생활에 더 열심을 부리고, 헌금도 더 많이 하고, 봉사도 더 많이 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립시다.’라고 설교를 한다면 그건 선동이요, 웅변이지 설교는 아닙니다. 그게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따라서 신비주의나 기복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성경 속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을 가르치는 것을 뒤로한 채 착한 삶, 열심 있는 삶, 선한 삶, 세상을 밝히는 삶 등을 가르치는 이들이 더 무서운 이리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은혜를 받은 자들의 실체에 대해 완전히 까발려야 합니다. 그 설교를 듣는 이들이 얼마나 추악하고 더러운 존재이며, 얼마나 불가능하고 무력한 존재인지를 매일같이 폭로해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올바른 설교를 듣는 양들은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자신의 실존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진짜 올바른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저 지금이라도 그냥 지옥 보내 주세요. 제가 예수님을 죽였네요. 제가 선악과를 따먹었네요. 저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손톱만큼도 입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저를 지옥에 보내주세요.’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거기에서 그 추악함을 덮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영생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의 깊이를 배우기도 전에,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기도 전에, 아니, 자신의 더러움에 치를 떨어보기도 전에, 열매를 맺으면 복도 받고, 천국에도 갈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 또 다른 바벨탑을 쌓게 하는 자들이 어찌 참된 선지자들이겠습니까?

 

여러분, 주님께서 열매를 맺는 주체가 누구라고 가르쳐 주셨습니까?

 

(15:4-5)

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보세요. 우리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유일한 좋은 나무이신 예수님에게 접붙임을 받은 나쁜 나무일뿐이라는 처절한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11:24)

24네가 원 돌 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이게 바로 우리의 실존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죄악의 현실과 그 죄악을 덮는 은혜의 현실을 외면한 채, 온통 가시나무와 엉겅퀴뿐인 저주받은 인생 속에 포도와 무화과를 내라는 억지 강요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 자신들의 세상 복과,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도에 지나는 헌금과, 도에 지나는 봉사와, 도에 지나는 종교 행위를 내어 놓고는 주여,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냈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도 행 했습니다하고 자기 의의 마일리지를 내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도 모른 채, 거짓 선지자들에게 자신들의 재산과 힘과 노력을 착취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노략질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잖아요? ‘가시와 엉겅퀴가 어찌 좋은 열매를 맺겠느냐?’ 그 말은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나무가 되어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아담 안에서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저주받은 존재들입니다. 한 마디로 나쁜 나무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쁜 나무인 자신의 본전을 보지 못하고, 격에 맞지 않게 좋은 나무 운운하고 있냐는 질책인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죄인 됨을 알지 못하고, 나쁜 나무됨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도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너스레를 떨며 행하는 자들이 내어 놓는 모든 열매가, 겉으로는 좋은 열매인 것처럼 보이고, 겉으로는 단단한 반석 위에 지은 집처럼 보이지만, 그 착한 행실들이 사실은 나쁜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이 하나님의 도끼에 찍혀 불에 던지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죄에 대해 충분한 이해도 없는 자들이 다른 이들에게 멋진 평판을 얻어내고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 너도 나도 착한 일에, 경건한 종교 행위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전부 잘 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게 비가 오고 창수가 나면 금방 물 천지가 되는 와디인 것입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늘 본문 바로 위에서 말씀하신 좁은 문, 좁은 길의 비유도 다른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7:13~14)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여기에 드디어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 좁은 문이 나옵니다. 그 길은 창세기에 나오는 생명나무로 가는 길입니다.

 

(3:24)

2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바로 이 길입니다. 말이 좁은 길이지, 엄밀히 말하면 아예 아무도 못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 좁은 길 끝에 좁은 문이 있습니다. 그 길은 협착해서 찾는 이가 적답니다.

많은 분들이 오해하는 것이 이 말씀을 육신의 편안함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것입니다.

, 자기 육신의 편함을 위해서 복을 받고 잘살려는 의도로 하나님을 찾는 것을 넓은 길을 가는 것으로 여기고, 반대로 남을 섬기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섬김의 신앙을 육적인 고난의 신앙이라 하여 좁은 길, 좁은 문이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설명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만 이 산상 수훈의 문맥 속에서 그 정도의 추론은 너무 가난한 해석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개와 돼지의 비유와 황금 율이라 불리는 하나님의 대접에 관한 이야기가 무엇에 관한 이야기였습니까?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먼저 우리를 대접해 주신 그 사건이 바로 하나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신 일이었고, 그 대접을 받은 이들은 반드시 하나님에게 믿음이라는 대접을 내어 놓게 되어 있다는 내용이었지요? 그리고 이어지는 것이 좁은 문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대접, 하나님의 율법지킴의 이야기 다음에 바로 너희들은 열심히 노력하여 고난의 문, 즉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내용이 나오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것이 좁은 문이라면 고생한 사람은 다 좁은 문으로 들어간 것이고, 이 땅에서 편안한 삶을 산 사람은 다 넓은 길로 간 사람들입니까? 그러면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전부 좁은 문, 좁은 길로 간 사람들인가요? 가난하게 살다간 사람들은 전부 좁은 문, 좁은 길을 간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이라는 것은 육신의 안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인간들은 전부 자신의 영광 챙기기로 일생을 올인 하는 존재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영광 챙기기를 위해서는 손해도 감수하고, 상함도 감수 하고, 심지어 목숨도 내어 놓습니다. 그게 죄의 무서움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영광과 인기와 자랑과 자존심을 챙기기 위해 기부도 하고, 봉사도 하고, 수도원에 올라가 금욕 생활을 하기도 하고, 순교도 불사합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학생 운동을 하던 친구들이 어느 날 할복을 하고, 투신을 하고, 분신을 하는 것을 보면 참 무서운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게 다 인간들의 가치 챙기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들은 인간 자신의 가치 챙기기를 위해서는 목숨을 버리는 것도 불사합니다.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 신이 되어버린 인간들은 그렇게 자기 영광 챙기기, 자기 가치 챙기기라는 본성에 의해 남에게 인정받는 착한 일, 선한 일, 종교적인 일에 열을 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전부 자기 자신입니다. 그게 세상 적 성공과 세상 적 부의 축재, 세상 적 번영 일수도 있고, 남들의 평가, 혹은 자기만족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일을 하는 자기가 너무 대견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저주 받을 죄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예수를 안 믿고도 착한 이들이 그렇게 많은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자기 영광 챙기기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예수를 믿지 않았던 간디 같은 사람이 좁은 문, 좁은 길을 갔다고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분명 금욕과 선행과 섬김으로 고생이 되는 삶을 살다가 가긴 했지만 넓은 길을 간 사람입니다. 그렇게 자기만족, 자기 자랑, 자기 영광을 위해 고생도 마다 않고 열심히 가는 그들이 가는 길을 전부 넓은 길, 넓은 문이라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좁은 문은 어떤 분이며, 좁은 길은 어떤 길이겠습니까? 자기의 자신감, 자존심, 자신의 능력, 열심을 모두 부인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바라며, 그 분 앞에 납작 엎드리는 그 길이 좁은 길입니다. 그 길은 아무나 못 갑니다. 자기를 해체하고, 자기를 부인해 버리는 길이기 때문에 아무나 못갑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만 믿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10:7)

7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14:6)

6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보세요. 예수가 좁은 길이고, 예수가 좁은 문이에요. 그래서 예수의 은혜를 모르고는 절대 그 좁은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따라서 좁은 문, 좁은 길로 들어서는 이들은 반드시 예수의 은혜와 예수의 긍휼 앞에서 자신의 티끌 됨을 먼저 인정해야 돼요.

뿐만 아니라 그 예수라는 좁은 문은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가고, 아무리 애를 써도 못 들어갑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편애,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자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13:24)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이렇게 좁은 문, 좁은 길은 하나님의 편애, 즉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그 은혜를 깨닫고 자신의 무력함과 티끌 됨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저는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이들이 가는 길이며 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풍성한 행위를 내어 놓는 넓은 길을 가는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의 착한 행위에 자신이 없습니다. 그게 진정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행위인지 자신의 영광을 위한 행위인지를 생각하고, 고민하고, 기도하며 갑니다. 그리고 혹시 그러한 행위가 자신에게서 나온다 할지라도 그게 자기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사시는 예수의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절대 자기 의의 마일리지로 쌓아두지도 않습니다. 그냥 늘 감사하고, 부끄럽고, 면목 없을 뿐입니다. 그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이들은 세상 적 선악의 판단 기준으로 볼 때, 굉장히 넓은 길로 가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부인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자기 자랑이 되는 일은 자꾸 감추게 되고,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는 일은 자꾸 숨기게 되기 때문에, 언뜻 보면 게을러 보이기도 하고, 무력해 보이기도 하고, 선한 일을 힘쓰는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좁은 길, 좁은 문입니다.

 

여러분, 생명의 길, 생명나무로 가는 길은 막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막아 놓으셨어요. 그 길은 인간의 그 어떤 수고와 노력으로도 못 가는 길이에요. 오직 예수의 은혜만 의지해야 돼요. 그 예수를 아십니까? 그 예수의 은혜를 아십니까? 그 예수 앞에서의 나의 추악함을 인정하세요? 나의 그 어떤 수고와 노력도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걸레(64:6)에 불과한 것임을 알고, 하나님의 의만을 겸손히 받아들이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좁은 길을 가는 분이 맞습니다. 여러분이 향하는 문은 좁은 문이 맞아요. 그리고 그런 가르침을 받고 있는 여러분이 참 선지자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이고, 그런 여러분이야말로 지금 열심히 반석 위에 집을 짓고 계신 것입니다.

 

반면에 여전히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존재로 부각이 되고,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사람들에게 훌륭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으로 생명나무 실과를 먹을 수 있다고 생각고, 열심히 자기 자존심 챙기기와 자기 구원 챙기기, 자기 천국 챙기기, 자기 영광 챙기기의 일환으로 착하게 살고, 선하게 살고, 봉사도 하고, 순교도 하는 그 사람들, 그들이 넓은 문으로 가는 자들이고, 거짓 선지자들이며, 모래 위에 겉만 번드르르한 집을 짓고 있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비유10.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10:25-37>

25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30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 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비유를,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이웃을 잘 섬기는 사람이 되자는 교훈으로 이해하고 있는 까닭에, 병원 이름도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 구호 단체 이름도 사단법인 선한 사마리아인, 고아원 이름도 선한 사마리아인 고아원, 등등 많은 이름들이 난무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선한 이웃이 되자는 교훈을 담은 비유가 아니라 너는 선한 이웃이 될 수 없다.’는 대척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비유인 것입니다. 전에 요한복음을 강해하면서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대해 간단하고 개괄적인 설명을 해드렸었는데, 많은 분들이 의아해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구약 성경의 여러 부분과 신약의 관련 성구들을 들어서 여러분이 이해하시기 쉽게 자세하게 설명할 테니까 잘 들어보세요.

 

자연과 사회, 그리고 인간 존재의 보편적 원리를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을 철학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철학하기를 아주 좋아합니다. 물론 철학이라는 독립적 학문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라는 테두리 안에서의 철학하기를 말합니다. 저는 철학하기를 통하여 저의 신앙과 성경의 이해에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그건 철학이 신학의 우위에 있다고 하는, 철학이 신학을 제한한다고 우기는 어떤 철학자들의 주장처럼 그런 류의 도움이 아니라, 철학을 통하여 인간과 역사가 배설해 놓은 더러운 아담들의 궤적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알고, 십자가를 아는 이들이 철학을 제대로 하다보면 은혜의 필연성이라는 결국에 당도하게 됩니다. 그런 연유에서 제가 신학을 연구하는 데에 철학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제가 요즈음 시간이 날 때마다 머리 식힘의 용도로 열심히 읽고 있는 철학 서적들이 현대 사상계와 현대 철학의 최고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들뢰즈와 가타리의 공동 집필 서적들입니다. 물론 라킹이나 칼 융 같은 중간 다리들이 있지만 제 생각에 지금 사상계의 최고봉은 들뢰즈와 가타리입니다. ‘철학과 굴뚝 청소부의 이진경 씨나,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진중권, 이정우 같은 사상가들이나 철학자들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은 사람들이지요. 그만큼 현대인들에게 미치는 그들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공동집필한 책 중에 천의 고원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등장하는 아주 인상 깊은 개념이 노마디즘이라는 개념입니다. 들뢰즈의 그 개념 하나를 설명하기 위해 이진경씨가 노마디즘이라는 1천 페이지 분량의 책을 썼을 정도니까 그 내용을 제가 지금 몇줄로 간단하게 설명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언어도단입니다. 그래도 오늘 설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노마디즘이라는 것은 노마드, 즉 유목민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정처가 없는 유목민, 그들을 노마드라 합니다. 그래서 노마디즘을 유목주의라고도 합니다. 이 노마드라는 단어를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이라는 책에서 사용함으로서 그때부터 철학용어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천의 고원이라는 가타리와의 공동저서에서 확실하게 정리를 해 놓았지요.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사상이나 사회는 곧 정형화되고, 고착화되며, 코드화되어 단단한 틀에 갇혀버리게 되는데 그렇게 코드화되어버린 사상이나 사회체계는 필연적으로 위계와 억압과 지배체제를 갖게 되고 거기에서 반드시 소외된 계층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한 모순점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에 거기에서 밖으로 튕겨져 나가는 것이 바로 노마디즘입니다. 고착화, 고정화, 코드화, 정형화되어 있는 틀 속에서 자유로운 장으로의 탈주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소외된 무리가 고정화된 위계사회에서 벗어나 자신을 억합하고 제한하는, 폭력적 지배자가 없는 자유로운 평등사회를 꿈꾸는 것입니다.

 

일전에 버지니아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비행기 안에 비치되어 있는 잡지표지의 광고 문구에 그 노마드라는 단어가 쓰여 있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바로 우리 한국의 기업인 삼성의 광고였습니다. 그들이 그 노마드라는 철학 용어를 광고 카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보는 순간 역시 삼성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왔지요. 물론 삼성이 내세우는 디지털 노마드는 들뢰즈의 노마드 사상과는 그 깊이에 있어서 거리가 좀 있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당대 최고의 철학 사상을 노트북 광고에 사용하는 것을 보고 거대 자본이 철학을 점령하여 그것을 경영에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놀람을 금치 못하면서 한편으로는 소름이 끼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어치피 철학이라는 것이 인본주의의 극치인 칼 맑스와 프로이드를 벗어나지 못하고, 거기에 조금 보태거나 빼는 식의 철학에 머무르는 것이기에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지요.

차치하고, 그렇게 모든 인간은 자신들의 유익과 안위를 위해 탈영토화, 탈국가화, 탈고착화를 시도하는데, 문제는 그렇게 탈주한 무리는 또다시 고착화, 정형화, 코드화의 단계를 거치게 되고, 그 안에서 또 다시 그 틀을 깨고 나가는 운동이 반복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노마디즘이 진보세력이나 급진 개혁자들에게 붙들려 쓰이게 되면 민주화 운동, 사회개혁, 사회정화 운동 등으로 전개가 되기도 합니다. 아무튼 노마디즘이라는 것은 탈영토화, 탈국가화, 탈위계화를 향한 경향입니다.그래서 들뢰즈는 인간의 역사를 탈주의 궤적이라고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고정화되고, 고착화되고, 정형화되고, 코드화된 틀에서 항상 탈주를 시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탈주의 궤적입니다. 그런데 성경 전도서에 보면,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하나님의 선언이 나옵니다. 마치 사람들의 패션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내어 놓는 것 같아도, 결국은 돌고 돌다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처럼, 인간들의 탈 영토, 탈 국가의 시도, 즉 탈주의 궤적은 수레바퀴처럼 돌고 돌며 항상 같은 궤적을 답습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인간의 삶의 목적이 나의 영광 챙기기, 나의 유익 챙기기라는 한가지에 집중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순환하는 탈주의 궤적에서 완전한 탈주를 하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제가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창세기를 읽다가, 창세기 안에서 그 노마드라는 단어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찾아가셔서 그를 갈대아 우르에서 뽑아내시지요? 갈대아는 바벨론의 전신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살던 갈대아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 세상 나라의 상징인 바벨론이라 해도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반드시 나와야 할 애굽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에게 찾아가셔서 당신 백성의 탈영토화, 탈국가화를 직접 주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게 고착된 영토화 국가에서 빠져나와 텐트를 치고 생활을 하는, 정처가 없는 유목민을 성경이 노마드라 부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노마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시작된 구약의 역사가 어디에서 마무리되지요? 바벨론에서 마무리됩니다. 바벨론에서 나온 인간이 다시 제 발로 바벨론으로 기어들어가 포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것이 구약입니다.

자신의 유익과 발전과 성공과 안위를 위해 고착화되고 정형화된 인간이 만든 국가에서 끊임없이 탈주를 시도하는 인간들은 결국 인간들의 국가로 귀소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리해서 말씀을 드리면 이러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스스로가 신이 되어 하나님처럼 살고자 하는 인간들은 반드시 스스로 거주의 경계를 긋고 자신의 세력을 국가화, 영토화 시키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 과정 속에서 소외되는 무리가 생기게 되고, 그들은 그 곳에서 탈주를 시도하여 노마드의 삶을 추구하지만, 스스로 왕이 되어야 하는 인간들은 곧 자기들만의 국가와 영토를 고착화시키게 되고, 거기에서 또다른 소외계층이 발생을 합니다. 결국 인간들은 자기가 왕이 되기 위해 고착화된 영토와 국가와 사상과 사회에서 탈주를 시도하지만 결국 다시 인간 세상의 국가와 사회와 사상으로 귀속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게 타락한 인간들의 마귀의 세상에로의 귀소본능입니다. 그걸 어려운 말로 재 영토화라 합니다. 그래서 구약이 갈대아에서 나오는 것을 시작으로하여 바벨론으로 다시 기어들어가는 그림으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타락한 모든 인간의 현실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인간이 돌아가려 하는 세상 국가는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나라인 것입니다 거기에서 탈주하지 못한 이들은 아무리 노마디즘에 의해 탈주를 시도한다 해도 결국 라는 이기적 왕국으로 귀환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나와 다시 바벨론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무리들 중에서 하나님의 편애를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진자 노마드가 됩니다. 그들은 이 땅의 나라에서 정착할 수가 없습니다. 백마를 타고 철장을 드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태운 말들에 채찍을 내리치시며, 이 세상에 장막을 칠 수 없게 만들어버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절대 자기 자신이라는 나라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옛 사람이라는 자기 속의 나라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계속해서 파괴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돌아갈 나라를 상실해 가는 과정을 겪습니다. 그 과정을 신앙생활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대아 우르에서 뽑혀 나온 하나님의 백성들은, 갈대아 우르를 나선 아브라함이 다시 갈대아로 돌아갈 수 없었던 것처럼, 또 다시 바벨론으로 돌아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라는 이기적 나라는 계속 부인되고 부정되는 과정을 겪다가 결국에는 완전히 멸망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게 옛사람의 소멸입니다. 애굽에서 뽑혀 나온 이스라엘 뒤를 홍해가 막아버린 것이 바로 그러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현실을 알기 쉬운 그림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못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 같은 이 땅에서 이방인이요, 나그네로 살게 됩니다. 그게 진정한 하나님의 노마드입니다. 진정한 노마드는 자신이 뛰쳐나온 고착되고 코드화된 그 틀에서 마음까지 거두어들이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제 견해로는 탈 영토, 탈 국가를 시도한 자가 또 다시 재영토화 작업에 몰입하게 되는 것을 진정한 노마디즘이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건 세상에 고착화된 정착민이 잠시 출장을 가거나, 이사를 할 때의 이동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탈 고착화라 이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들뢰즈가 점과 선으로 잘 설명을 했는데, 정착민은 선으로 이동을 하지만 그 선은 고착된 점에 종속이 된 것이라는 것이고, 진짜 노마드는 그들의 인생에 찍는 정지의 점들을, 어디론가 움직여져 가는 선에 종속시키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의 현실과 현상과 상황과 사건들은 어디론가 움직여 가는 노마드들에게는 그리 대단한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목표지점을 향해 선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벨론에서 끌려 나온 후 모리아 산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끊임없이 흘러야 했습니다. 그게 노마드입니다. 그 하나님의 노마드가 모리아 산으로 가는 여정동안 수많은 사건과 사고들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도 현실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을 위해, 도구요 방법으로 잠시 쓰이다 사라지는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 백성들의 현실인식이 바로 그러한 것이어야 합니다. 노마드의 인생의 점들은 선에 종속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은, 믿음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성이 되는 사람의 표본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 사는 정말 형편없는 우상장수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믿음이라고도 합니다. 그걸 객관적 믿음이라고도 하지요?

예를 들어, 아빠가 아이에게 아빠는 너를 믿는다.’라고 했을 때에 그 아빠의 믿음 안에는 기대와 소원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빠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전지전능한 아빠입니다. 그럴 때 그 아빠의 믿음은 그 아이를 반드시 자신의 기대와 소원대로 완성시켜 내고야 맙니다. 그걸 아버지 하나님의 믿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믿음은 그 속에 언약을 함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믿음을 언약이라고도 하는 것이고, 작정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형편없는 아브라함에게 아버지의 믿음, 아버지의 언약이 떨어지자 그가 정들었던 갈대아 우르에서 발을 뗍니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정해 놓은 목적지로 정처 없이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장막을 치라면 치고, 거두라면 거두면서 하늘에 의해 끌려가는 인생입니다. 그게 노마드의 인생이며 믿음의 사람들의 인생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믿음의 백성들과 세상 사람들의 탈영토화, 탈국가화의 과정은 비슷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둘 다 고착화되고, 정형화되고, 코드화된 곳에서 탈주를 시도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완전히 다릅니다. 한쪽은 자기 자신의 왕 됨을 위해 끊임없이 더 나은 번영과 발전된 자아를 추구하며 평화와 번영과 성공의 노마디즘을 추구하지만, 다른 한 쪽은 하나님에 의해 끌려 나가, 세상의 나그네와 이방인이 되는 진짜 노마드가 되는 것입니다.

전자는 그렇게 끊임없는 스스로의 자아 챙기기 작업을 거치면서 또 다시 자아라는, 세상에 고착화된 틀 속으로 회귀를 하게 되지만, 후자는 자신이 돌아가고자 하는, 자아라는 옛사람으로 향하는 길을 하나님께서 막아버리심으로 참혹한 자기부인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진정한 나그네요, 이방인으로 새로운 신분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성경에 나오는 노마드요, 하나님 백성들의 노마디즘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믿음은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어, 결국에는 자신을 완전히 죽이는 절대 순종의 자리에 세우십니다. 그 자리가 모리아 산의 아브라함의 자리입니다. 자신의 세상 왕 노릇을 위해 우상까지 만들어 팔았던 아브라함이 결국 모리아 산에서 100세에 낳은 아들, 즉 자신의 심장보다 더 귀한, 아들의 심장에 칼을 꽂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은 곧 자신의 완전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신앙 여정입니다. 하나님의 노마드는 절대 이 세상의 가치와 행복과 쾌락을 소유하고 쌓는 자리로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은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믿음, 하나님 은혜의 왕노릇에 의해 주도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실수와 실패와 미성숙과 어리석음을 폭로 당하면서, 그저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좇아갔을 분입니다. 그랬더니 모리아 산의 아브라함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의 행위는 아브라함의 믿음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믿음이 만들어낸 하나님의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 측에서의 열심을 알기 쉬운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이 모리안 산의 여호와 이레 사건입니다. 자기를 죽일 나무를 메고 산을 오르는 청년이 있습니다. 자기를 번제물로 드리겠다는 아버지의 말에 충분히 이 잔을 나에게서 옮겨 달라는 거부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나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이 그냥 순순히 아버지의 오라에 묶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심장을 향해 독을 내뿜고 있는 아버지의 칼을 순종의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누구의 모습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죽어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살아난 것입니다. 물론 그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는 아브라함도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모리아 산의 아브라함은 그 모든 하늘나라 백성들의 대표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즉 교회는 그렇게 제단에 묶인 이삭에게 접붙임을 당해 살아나는 형국인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우상이나 섬기고, 우상이나 만들어 팔던, 죽어야 할 자가, 하나님이 준비하신 약속의 후손의 죽음에 연합이 되어, 약속의 후손이 죽고 그가 대신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브라함과 이삭 곁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어린양이 상징으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리아 산에서의 아브라함의 행위는 일차적으로 누구의 행위입니까?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그 하나님의 행위가 없었다면 아브라함의 행위는 절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대표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행위는 하나님의 행위에서 격발된 결과론적 행위였지, 아브라함이 열심히 노력해서 만든 행위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의 왕 노릇에서 격발된 거져 얻은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걸 염두에 두시고 야고보서로 가보세요.

 

<2:21-26>

21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25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이 말씀과 로마서 4장의 말씀을 한 번 비교해 보세요.

 

<4:1-3>

1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마치 야고보와 바울이 서로 언쟁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으세요? 한 쪽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 다른 한 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도 아니라고 박박 우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하는 많은 분들이 야고보서의 이 부분과 로마서의 행함을 부정하는 듯한 칭의의 믿음 부분을 어떻게든 화해를 시켜보려 애를 쓰는데,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그 둘은 정확하게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야고보가 말하는 아브라함의 행함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대속 제물에 접붙여지는 하나님의 행함에 의해 주도된, 결과론적 행함입니다. 그러니까 그 행함은 아브라함의 행함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행함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행함은 반드시 당신의 백성을 갈대아, 바벨론, 애굽이라는 이 세상 국가에서 이끌어 내시며 결국에는 자기 자신이라는, 스스로의 왕국으로 귀환할 수 없도록, 자기 자신의 옛사람의 심장에 칼을 꽂는, 완전한 자기 부인의 자리로 완성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게 아브라함의 삶에서 격발되어 나온 행함이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잘 생각해 보세요. 아브라함은, 약속의 후손이 그에게서 나서 그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후 그 언약의 열매에 스스로의 힘을 보태기 위해 아내를 두 번이나 팔아먹으면서 하나님의 언약을 지켜내려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죽으면 하나님의 언약이 실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인간적으로 볼 때 아주 기특한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그게 율법주의입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를 팔아서라도 하나님의 언약 성취에 도움이 되어 보겠다는 시도 자체가 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자신의 지혜와 선악 판단으로 스스로 무엇을 행하는 것, 그것이 죄입니다.

그런데 그랬던 아브라함이 파란만장한 신앙의 여정을 통과한 후, 하나님이 하신 언약은 자신이 도와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성취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언약의 후손으로 주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가슴에 칼을 꽂을 수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인간의 선악 판단에 의하면, 그가 죽으면 하나님의 언약이 실패가 될 것이 뻔한 데도 아브라함이 자신의 판단을 유보하고 하나님의 판단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의 행함은, 혹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감동하실만한 기특한 행함이 아니라, 그와는 정 반대로 자신의 행함 전체를 완전히 부정하고 하나님께 모든 주도권을 넘겨드리는 행함인 것입니다. 그동안 내가 힘써 개입해 왔던 하나님의 언약 성취의 과정에서 내가 빠져버리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모리아산 이전까지의 아브라함의 행함이 율법주의적 관점에서의 기특한 행함이었던 것이고, 모리아 산의 행함은 자신의 판단과 지혜와 노력을 다 부정하는, 자신에 대한 완전한 포기의 행함인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행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의지하도록, 구원 당사자들의 심장에 칼을 꽂는 자기부인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함이 바로 구원 얻는 행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행함은 인간 측에서의 모든 시도를 완전히 멸해서 죽이는, 성도 측에서의 자기부인의 행함을 격발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행함에 근거한 자기 부인의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 아니라 착한 일, 선한 일로 하나님 앞에서 점수를 따 보겠다는 그런 행함이 죽은 믿음의 행함이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반대죠?

생각해 보세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을 잘못 이해를 하게 되면, 인간의 행함에 의해 믿음의 진위가 결정이 되는 이상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셨는데 인간이 행함으로 그 믿음을 확증해 내지 못하면 그 믿음이 죽은 믿음이 되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라는 제품에 인간의 행함이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는 이상한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마련하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에는 인간 측에서의 어떤 불순물도 가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야고보서에서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씀은 십자가 은혜라는 하나님의 행함에 의해, 자신의 옛사람의 심장에 칼을 꽂는 자기부인의 행함으로 이어지지 않는, 인간 측의 노력과 공로가 가입된 불순물 묻은 믿음은 가짜 믿음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는 말씀은, 착한 일을 많이 하지 않는 믿음은 가짜 믿음이라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측에서의 착한 일이나, 선한 행위에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행함에 의해, 구원에 있어서 인간 측에서의 모든 행함을 부정하는 그런 행함으로 이어지지 않는 믿음은 가짜라는 완전히 반대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이야기 바로 밑에 기생 라합의 이야기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행함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라는 왕국에서의 탈출이며, 라는 왕국의 왕의 보좌에 칼을 꽂는 자기 부인의 행함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기생 라합도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의 나라를 떠나, 하나님의 노마드가 되어, 자기가 속했던 나라를 멸망시키러 오시는 하나님의 나라로 편입이 되어 들어가는 구원의 시나리오, 하나님의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여자인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기생 라합은 가나안 여자입니다. 가나안은 누구의 아들입니까? 저주받은 노아의 아들, 함의 아들입니다. 함은 하나님의 덮어줌의 은혜를 이해하지 못한 자의 대표로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 가나안도 그 함에게 속하여 하나님의 덮어줌의 은혜를 무시하고 깨닫지 못하는 그런 세상 사람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둘 다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함의 후손이 애굽 사람들이고 가나안의 후손이 가나안 부족들입니다. 그 둘 사이에 이스라엘이 끼어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함(애굽)이나 가나안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하면 그냥 멸망의 자리로 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임하자 이스라엘이 함의 땅에서 탈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광야 인생길을 거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 그곳에 있는 가나안 족속을 전부 멸하고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요한계시록입니다. 물론 모두가 상징입니다.

 

그런데 그 함과 가나안이 멸해지는 방법과 과정을 한 번 보세요. 함의 땅 애굽에서 무죄하고 가엾은 어린양의 피의 공로로 함의 장자들이 멸해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탈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광야, 즉 성도의 인생 동안에 거쳐야 할 광야교회(7:38)를 거쳐 완전한 하나님 나라로 입성하게 될 때에도 똑같이 어린양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게 멸해져야 할 가나안 땅의 라합입니다.

라합은 창녀입니다. 당시에는 사람 취급도 못 받던 여자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라합이 자신이 속한 나라를 멸하러 오시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나라를 40년 동안 기다립니다. ‘난 그분에 의해 멸망당한다 해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자라는 인식이 그녀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을 안 것입니다. 라합은 자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그 나라에서 빠져나와 하나님 백성의 나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보잘것없는 창녀에게 이스라엘 전체의 운명을 접붙임 시켜버리십니다. 창녀 라합이 신고를 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녀 라합이 자신이 속한 가나안이라는 나를 배반하고 하나님 나라로 편입이 됩니다. 이스라엘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원을 받은 라합에게 속하여 광야 교회동안 문제만 일으키던 하나님 백성들이 덤으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생 라합은 자신을 죽이러 돌진해 오시는 하나님께 항복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가 속한 세상 나라, 가나안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는 자로 선 것입니다. 기생 라합이 자기가 속한 세상 나라를 부정하고, 배반한다는 것은 그동안 자신이 속해 있던 세상에 대해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세상을 하나님께 팔아 넘겨버린 것이니까요. 그렇게 죽음을 감수하고 하나님께 순종한 보잘것없는 창녀, 어린양이 하나님 나라인 이스라엘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기생 라합 안에 누가 들어 있습니까? 예수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생 라합의 행함 역시 누구의 행함이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행함에 의한 세상 속 라합의 죽음, 자기부인의 행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고보가 말한 아브라함의 행함이나, 라합의 행함은 인간의 도덕과 윤리라는 선악 판단기준에 의한 행함이 아니라, 죄인을 건지시고, 부인시켜 가시는 하나님의 행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아들의 심장에 칼을 꽂는 행함이 도덕적으로 옳은 행함입니까? 거짓말을 해서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아요? 아니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그들의 행함을 예로 들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믿음의 행함을 설명하고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의 행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함과 그 행함에서 격발되는 하늘 백성의 노마디즘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야고보서를 잘 보면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그대로 복사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2:1-4, 10-12>

1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2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 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4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10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12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3:17-18>

17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18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4:11-12>

11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12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이게 다 뭡니까? 우리가 몇 주간에 걸쳐서 공부한 마태복음 5-7장까지의 산상수훈의 교훈이지요? 그걸 다 누가 지켰다고 했지요? 황금율, 예수님께서 다 지켜서 우리를 먼저 대접해 주셨다고 했지요? 따라서 행함이 없는 믿음에서의 이 행함은 다 누구의 행함입니까? 예수님의 행함입니다. 그 예수의 행함이 믿음 안에 녹아 들어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행함이 우리를 부인시키고 죽여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행함이 있는 믿음만 진짜 믿음입니다. 그런 연유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선언합니다.

 

<고전1:30-31>

30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가 의이고, 예수가 거룩함이고, 예수가 구속함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행함이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함에 접붙임을 받는 은혜의 구원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영생은 하나님의 우발적이며(기대하지 않음의 의미), 폭력적이며(제한적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견인의 의미), 무조건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행위가 단 1%라도 공로로 가입이 되면 그건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가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이라는 것은 라는 존재가 완전히 부인이 되는 과정에서, 하나님 은혜의 필연성이 확인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난 하나님 없으면 단 한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무력한 죽은 흙입니다.’라는 고백이야 말로 신앙고백의 정수인 것입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오늘 본문을 해석해 보세요.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묻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능통한 그 율법사에게 율법에서는 뭐라 하더냐?’ 하시며 다시 되물으십니다. 그랬더니 율법사가 훌륭하게도 신명기 6장의 쉐마로 율법을 잘 요약하여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바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아주 잘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네 대답이 옳으니 이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거기까지만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우리의 몫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만 잘하면 우리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커다란 반전이 있습니다.

그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즉 자신은 충분히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누가 내 이웃입니까하고 묻습니다. 누가 이웃인지 말만해주면 다 사랑해버리고 말겠다는 기세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영생의 본질을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네가 진짜 누굴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어떤 이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을 만치 맞았습니다. ‘거반 죽은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헤미다데스거의 죽다, 완전히 기진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강도 만난 사람은 숨만 겨우 쉬고 있는 상태로 자아방어 능력을 상실한 사람인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당시에 아주 유명한 강도 출몰지역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성전이 있는 곳이었고, 여리고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약 만 이천 명 정도가 살고 있는, 성전 섬김이들의 집단 거주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노린 강도들이 수시로 출몰하여,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이 마차나 말 등에서 절대 내리는 일이 없었고, 도보로 다니는 사람들도, 무리를 지어서 다니거나 길에서 멈춰서는 일 없이 바삐 오가던 그런 길이었습니다. 그 길 이름이 피의 길입니다. 그 길에는 수시로 강도들의 미끼가 던져져 있었습니다. 아픈 척, 다친 척하는 미끼가 사람을 유인하면 강도들이 몰려나와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때문에 그곳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곳을 지나다가 섣불리 길에 넘어져 있는 사람들을 만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불문율처럼 지켜지던 곳이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강도만난 사람이 거의 죽어서 누워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내 이웃입니까?’를 묻는 율법사에게 '누가 강도만난자의 이웃이냐?‘라고 되물으시지요?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은 그 율법사를 누구에 비유하고 계신 것입니까? 강도만난 자에 비유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으로 영생에 이를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고 그렇게 실행하고 있다고 하는 율법사에게 너는 누구를 사랑하고 도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네가 바로 은혜와 긍휼을 입어야 할 강도만난 자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는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어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인본주의에 빠져 율법지킴을 구원의 방법으로 알고 있는 이들의 상태였던 것입니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그 상태가 바로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강도만난 자로 비유되고 있는 율법사는 무엇을 강탈당한 상태라는 것입니까? 돈일까요? 건강일까요? 명예일까요? 아닙니다. 마귀는 그런 걸 빼앗아 가지 않습니다. 그건 가끔 필요에 의해 하나님이 빼앗아 가시는 것이지 마귀는 그런 걸 강도질 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많이 주어질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데 왜 굳이 그 강도가 그런 걸 빼앗겠습니까? 강도 만나 거반 죽어있는 자가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자가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자라는 걸 상기해 보면, 그 강도 만난 자는 다름 아닌 하나님을 잃은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야 하는,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가 뱀(마귀)이라는 강도의 속임수에 속아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죽어있는 상태가 바로 율법주의 유대주의, 인본주의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강탈당한 채 죽어있는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이 뻗칩니다. 구약의 율법과 제사를 상징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강도 만나 거반 죽은 자를 보고도 그냥 지나갑니다. 손도 못 댑니다. 그건 율법과 제사로는, 하나님을 잃고 거반 죽어있는 상태인 강도 만난 자를 절대 도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율법의 본질이 뭡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지킴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가장 잘 배우고, 잘 실행하며, 잘 가르친다고 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율법지킴을 위해 이웃을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껍데기만 훌륭한 율법주의의 실체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냥 지나쳤다고 해서 그들의 매정함을 나무라는 데에만 집중하면 안 됩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성전으로 제사를 지내러 가는 길 아니면, 제사를 지내고 집으로 내려가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24개조로 나뉘어서 일주일씩 일 년에 두 번 정도 제사와 성전 봉사를 했기 때문에 나머지 시간에는 그 길을 다닐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절대 부정한 것을 만져서는 안 되는 성전 섬김이들이었고, 율법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이나 마차에서 내리거나, 멈추어서 얼쩡거릴 수 없는 그런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강도 만난 사람은 강도들의 미끼일 가능성이 농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 길을 지나는 사람을 움직이고, 반응하게 하고, 행동하게 하는 것은 긍휼의 마음보다는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다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강도 만난 자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매정하고 매몰찬 자들로 몰아세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건 자기 영광 챙기기, 자기 가치 챙기기에 전념하고 있는 모든 인간들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과 제사, 즉 행위는 절대 강도 만난 자를 도울 수 없다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지킴, 즉 이웃 사랑은 사람의 행위에서 생산되어 나올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에게 사마리아인이 다가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유대 땅입니다. 유대 땅에서의 사마리아인은 개 취급도 못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사마리아 사람들은 남 유대사람들의 원수였습니다. 오죽하면 유대인들은 너무나 장사가 안 돼서 굶어 죽기 일보 직전에도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물건을 팔지 않았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위험한 땅에 율법주의의 이방인이자 유대주의의 원수인 노마드, 사마리아인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곳은 율법의 땅의 상징인 예루살렘과 여리고를 잇는 유대 땅입니다. 그곳은 성전과 그 성전을 섬기는 제사장들의 거주지를 잇는 곳입니다. 뿐만 아니라 강도들의 땅이며 원수들의 땅입니다. 사마리아인은 그곳에서 그 누구에게 붙들려도 죽음을 당하게 되는 그런 곳입니다.

그 율법의 땅, 강도들의 땅에 그들과는 전혀 다른 이방인, 이 세상 나라의 노마드, 율법의 화신인 유대인들의 원수가 사마리아인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자기들의 안위와 유익을 위해서는 거반 죽어가는 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 형식적인 율법과 제사의 땅에 진짜 선한 이방인이, 원수들의 땅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는 위험을 무릅쓰고 원수를 살려냅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원수를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영생이며, 그게 바로 구원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죄인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이웃은 예수에 의해 사랑을 받고, 섬김을 받아 주어지는 것이라는, 구원과 영생의 본질을 설명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자신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믿는 인본주의의 땅, 율법의 땅에 그들과는 전혀 다른, 십자가의 삶, 은혜의 삶을 가지고, 원수인 강도 만난 자들을 구원하러 오신 이 세상의 이방인, 이 세상의 노마드인 선한 예수가 바로 그 사마리아인으로 비유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을 목숨 걸고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지금 혹시 아닌 데요, 저는 제 자식을 제 목숨보다 사랑하는 데요?’하고 반문할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 사랑이 정말 아무런 사심이 없는 진실한 사랑 맞습니까? 혹시 자신에 대한 사랑과 집착이 그 내 것으로 주어진 자식에게 투영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게 자기 사랑인지 진짜 자식 사랑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 아세요?

여러분, 자녀가 예수를 잘 믿다가 일찍 요절을 했다고 해 보자고요. 그 때 여러분의 마음이 어떨 것 같으세요? 여러분이 진짜 사심 없이 그 자식을 사랑했다면 그 자식이 이 고난의 세상에서 달려갈 길을 일찍 마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 어서 데려가세요.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그게 진짜 그 아이에게 복된 일이니까요. 그렇지요? 그런데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아마 그 일로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 일을 기뻐하고 축하하며 감사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누구를 사심 없이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못됩니다. 자식마저도 그렇게 내 존재의 확장으로서만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낱낱이 폭로당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긍휼을 감사함으로 이해하며, 그것으로 배부른 이들이 다른 이들에게 그 하늘의 먹거리를 소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예수님을 찾아 온 부자 청년이 똑같은 질문을 했었지요? ‘무슨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계명을 지켜라청년이 대답하지요? ‘다 지켰습니다.’ 게명을 다 지켰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그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변혁이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살짝 떠 보신 것입니다.

그러면 너 네가 가진 소유 다팔아서 가난한 이웃들에게 다 나누어 주고 나 따라올 수 있어?’ 그 청년이 머뭇거립니다. 주님은 그 말씀을 하시면서 맘모나스라는 단어를 쓰십니다. 그건 신의 이름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세상 가치를 총괄하여 함의하는 단어입니다.

주님은 계명을 모두 지켰다고 너스레를 떠는 그 청년에게 십계명의 제 1계명을 들어 시험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자신이 계명을 모두 지켰다고 믿어온 그 착하고 성실한 청년은 결국 첫 번째 계명도 지키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이 그를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겉만 번드르르한 선행과 착함과 율법지킴으로 자신의 가치와 자존심을 챙기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 상태에서 이웃 사랑이 나올 리가 없습니다. 뒤돌아가는 그에게 주님이 말씀하지지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사람은 절대 누구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에 하나님이 먼저 사랑으로 부으셔서 그 사랑으로 배를 채워 주시고 그 채워진 배에서 나오는, 자기 부인에서 나오는 진자 이웃 사랑을 하나님께서 끌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의 선한 이웃으로 오신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여, 면목 없는 강도 만난자의 모습으로 영생으로 가야 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평생을 인본주의라는 뱀의 아가리 속에서 살아온 죄인들은 예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분이 나쁜 것입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자신의 영생에 자기도 뭔가를 기여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 이들에게 오직 은혜만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사마리아인처럼 낯설고 미운 것입니다. 아니 원수처럼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일 강도를 만나 예루살렘 길에 쓰러져 있던 그 사람이 조금의 힘이라도 남아 있었더라면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았을까요? 절대 안 받습니다. 왜 치사하게 남의 도움을, 그것도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습니까? 그게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처럼 되어 보겠다고 나선 타락한 죄인들의 속성입니다. 나를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이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게 되었지요? 거반 죽었거든요. 거의 죽어서 사마리아인이 이리 굴리면 이리 구르고, 저리 굴리면 저리 구르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거부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아직도 자신의 의를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 죽은 흙으로 항복하지 않고 있는 성도들이 바로 그 자리로 해체되어 가는 것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할 때까지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훼미다네스거반 죽이십니다. 그게 자기부인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그렇게 거반 죽어, 이 세상의 그 어떤 힘도 의지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만을 의지하여 자신을 내어 맡기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게 영생입니다. 그러한 이들에게 내 뜻, 내 꿈, 내 비젼, 내 야망, 내 의견, 내 주장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너무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속 우리를,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헤미다네스거반죽이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의 은혜만 붙들라고, 이 세상의 삶의 원리인 힘의 원리와는 전혀 다른, 십자가라는 하늘의 삶의 원리를 들고 이 땅에 오신, 세상의 이방인이신 예수를 붙들라고 우리를 거반 죽이시는 것입니다. 왜 죽은 자들이 자신들이 죽은 자라는 걸 인정하지 않고 마치 산자들처럼 기고만장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세상에 대해 살아있고 하나님에 대해 죽은 자들의 삶인 것입니다. 진짜 세상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산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티끌처럼 겸손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펄떡 펄떡 뛰는 당신의 백성을 거반 죽여가시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신앙생활이며 이 땅에서 나타나는 성도의 영생입니다. 실망되십니까? 그걸 거부하시면 안돼요.

우리가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져 주라고, 당해 주라고, 섬겨 주라고, 십자가를 지라고, 용서해 주라고, 요구하시면서 우리를 치유하고 계시는 그 선한 사마리아인인 예수의 말씀을 듣고도, ‘이 이방인이 왜 이렇게 낮선 이방나라 말만 하고 있는 거야?’하며 계속 거부하다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철장으로 거반 죽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부인시키시는 예수님의 치료를 순순히 받게 되는 거니까요.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반복하여 외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라, 십자가를 지라죽으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강도만난 자라는 걸,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절대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자라는 걸 확실하게 깨닫고 인식하실 때까지 하나님은 여러분을 철저하게 밟아 죽이실 것입니다. 그 때 당황하지 마세요. 아니면 말씀의 검을 사용해서 스스로 자살을 하세요. 옛 사람의 자살, 그게 잘 안될 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게 기도입니다.

조금이라도 살아있으면 안됩니다. 그건 영생 얻은 자의 삶이 아닙니다. 죽읍시다.

 

비유11. 금식, 새 옷, 새 부대, 묵은 것, 그리고 찢어짐

 

(신랑을 빼앗긴 자여 금식하라)

 

 

(5:27-39)

5:27 그 뒤에 예수께서 나가셔서,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5:28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갔다.

5:29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에게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많은 세리와 그 밖의 사람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서, 그들과 한 자리에 5)앉아서 먹고 있었다. , '기대어 누워서'

5:30 바리새파 사람들과 그들의 율법학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불평하면서 말하였다. "어찌하여 당신들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먹고 마시는 거요?"

5:31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5:32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러 왔다."

5:33 사람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파 사람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는군요."

5:3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혼인 잔치의 손님들을, 신랑이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 금식하게 할 수 있겠느냐?

5:35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인데, 그 날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

5:36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또 비유를 말씀하셨다. "새 옷에서 한 조각을 떼어내서, 낡은 옷에다가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그 새 옷은 찢어져서 못 쓰게 되고, 또 새 옷에서 떼어낸 조각은 낡은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5: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다가 넣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그 가죽 부대를 터뜨릴 것이며, 그래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가죽 부대는 못 쓰게 될 것이다.

5: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5:39 6)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나서, 새 포도주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묵은 포도주를 마신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한다." (다른 고대 사본에는 39절이 없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성경을 전혀 알지 못하는 이들도 자주 인용을 해다가 쓰는 아주 유명한 비유입니다. 사람들은 묵은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할 때나, 구정권이 물러가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을 때, 혹은 신출내기의 선거 유세 등에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구호를 자주 인용 해다가 쓰곤 합니다. 전혀 잘못된 인용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 술과 새 부대, 생베 조각과 헌 옷의 비유는 그보다 훨씬 웅숭깊은 십자가 복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비유입니다.

 

오늘도 다루어야 할 내용이 많기 때문에 거두절미하고 성경 본문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등장인물이 누구인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의 제자인 세리 레위(마태)가 등장하고, 레위의 집에 들어가셔서 식사를 하시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방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나오지요? 그런데 같은 비유가 적혀있는 마태복음으로 가면 비방하는 무리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아닌 세례요한의 제자들이라고 나옵니다.

 

(9:14)

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 하나이까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방하고 있는 이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세례요한의 제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렇다 치고 세례요한은 예수님 편 아니었나요? 그런데 왜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이토록 공개적으로 비방을 하고 나섰을까요? 하나님은 지금 묵은 것을 좋아하는 죄인들의 속성을 폭로하고 계신 것입니다. 거기에선 세례요한의 제자들일지라도 자유로울 수가 없더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세례요한까지도 감옥에 갇혀있는 자신의 처지를 바라보며 오실 이가 당신이 맞습니까?’라고 물을 정도였지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던 세례요한은 구약 적 세계관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금식이지요? ‘왜 우리는 금식 일에 금식하는데 너희는 먹고 마시느냐? 그것도 세리의 집에서?’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에는 일 년에 단 한번, 대 속죄일에 금식을 하라는 규례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23:27,29,32) 금식이라는 것은 인간의 육신에 에너지 공급을 중단하는 것으로서, 육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금식이라는 것은 인간이 자신들의 처음 자리, 즉 죽은 흙의 자리를 직시하고 수긍하는, 쉬운 말로 인간존재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스스로 인정하고 난 죽은 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행위가 금식이었습니다. 대 속죄일의 금식은 그렇게 하나님의 죄 사함의 은혜 앞에서 인간은 죽은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를 꼭 붙드는 순종과 자기부인의 행위로 요구된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구약의 금식에 관한 내용을 좀 더 자세하게 공부하고 싶으신 분들은 창세기 44장 강해 이유 있는 모함이라는 설교를 참조 하세요.)

그런데 인간들이 기특하게도 일 년에 한 번만하면 되는 금식을 계속 늘려 갔습니다. 스가랴서에 보면 이스라엘이 성력으로 4월과 5, 7월과 10월에 각각 어떤 날을 정해서 금식을 해왔다는 사실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이 시키신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스스로 늘려간 것이었습니다. 그게 계속 늘어나다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유대인들, 심지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요한의 제자들까지도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했습니다. 그건 율법도 아니었고 그저 장로들의 유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일 년에 한번만 하라고 요구하신 금식을 매 주 두 번으로 늘려서 하나님을 감동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금식을 통해 자신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자신들의 경건함을 자랑했고, 이방인들과의 구별됨과 차이성을 드러내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건 밥은 굶기는 굶는데,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모양으로 율법을 지킨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속죄의 은혜 앞에서 너희들의 처음자리를 확인하고, 너희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여 자기를 부인하라는 의도로 금식을 명하셨는데, 유대인들은 우리는 이렇게 도에 지나는 금식까지 함으로 해서 하나님도 감동하시는 기특한 일을 하는 유일한 민족이라는 자기 영광 챙기기와 자기 가치 챙기기의 일환으로 금식을 했던 것입니다.

 

물론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는 좀 다른 의미로 금식을 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례요한으로부터 오실 메시아에 관해 들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메시아를 맞기 위해서는 금식이라는 자신들의 기특하고 경건한 행위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일주일에 두 번씩 꼬박꼬박 금식을 하식을 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처럼 금식이라는 행위를 자랑으로 여기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율법의 행위가 메시아를 맞이하는 자들의 최소한의 예의이며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율법주의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자신들이 힘들게 금식을 하고 있는 바로 그날, 예수라는 분이 제자들과 함께 세리 마태의 집에 들어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 것입니다. 그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합세하여 예수님을 비방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예수님이 당신을 비방하는 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오늘의 비유 말씀인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잘 보시면 예수님은 당신을 혼인잔치의 신랑으로 표현을 하십니다. 혼인잔치의 신랑과 함께 있는 이들이 어떻게 금식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금식이라는 것은 혼인잔치에서의 신랑과의 잔치 누림까지로 가는 과정에 필요한 것이었지 신랑이 함께 있을 때에는 전혀 무용한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금식을 포함한 모든 율법은 신랑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데에 필요한 몽학선생인 것이지, 그것 자체에 어떤 효능이나 효과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금식을 포함한 모든 율법은, 신랑이신 예수가 그 모든 것을 완전케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예수님의 공로를 은혜로 꼭 붙들기만 하면 된다는, 그 은혜의 복음으로 우리를 인도케 하기 위해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3:20)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6~17)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 이니라

(9:10)

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 이니라

 

보세요. 신약에 와서는 먹고 마시는 것, 즉 금식이나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의 구분 같은 율법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건 단지 예수가 오실 때까지만 어떤 교훈을 위해 주어졌던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성경이 우리 성도의 인생 전체를 금식의 삶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8:1~3)

1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구절은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의 이유가 적혀있는 구절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광야라는 것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과정으로 겪어야 하는 인생을 총칭하는 것입니다. 그걸 신앙생활이라고 명명해도 무방합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그의 설교에서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을 광야교회라고 부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까지 이 세상에서 살아내야 하는 인생 전체가 바로 광야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 속에 이스라엘의 그 광야 인생의 이유와 목적이 한마디로 요약이 되어 있는데, 그것이 낮추시고 시험하고 주리게 하심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낮추어지고, 시험당하고, 주려 죽는 삶이어야 맞는 것입니다. 주려죽는다는 것은 옛 사람의 아사(餓死)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낮추시고 주리게 하신다는 히브리어 단어가 라에브, 아나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가 레위기의 속죄일 규례에 그대로 등장합니다.

 

(16:29~31)

29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칠월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리하라

30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로 정결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31 이는 너희에게 큰 안식일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

 

여기에서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라는 어구에 쓰인 단어가 신명기 8장에 쓰인 히브리어 아나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의 대 속죄일에,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일은, 금식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레위기의 속죄일 규례와 신명기 8장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성도의 인생은 금식의 삶인데, 그 삶은 스스로를 낮추게 되는 삶이고, 시험을 당하는 삶이며, 옛사람의 아사, 즉 주려죽음을 경험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내용을 다 이해하고 하나님 앞에 나는 죽은 자에 불과하니 하나님의 은혜로 나를 덮어 주세요.’라는 고백으로 드리는 것이 금식이라는 종교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의 전 인생이 요약이 되어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행위가 금식인 것입니다. 그렇게 선악과를 따먹고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 이 세상의 왕으로 살고 싶어 했던 옛 사람이 금식의 삶으로 굶어죽게 되면, 그 때부터 자기에게 쏟아 부어지던 이기적 사랑이 하나님과 다른 이웃에게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솔직해져 보자고요. 여러분은 지금 구원을 받으셨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낮추시고 주리시는, 광야의 삶을 살고 계십니다. 한 마디로 금식의 삶을 살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그 금식의 삶 속에서 진짜 여러분의 옛 사람이 주려 죽고 있나요? 아니면 주려 죽기는커녕,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서 세상의 떡을 향한 정욕과 탐심을 주체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계신가요? 후자가 맞지요? 오늘날 교회는 옛 사람의 가치와 자랑을 위해 떡 주세요, 떡 주세요를 주문처럼 뇌까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지금 금식의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니잖아요? 분명 신명기에서는 성도의 광야 인생의 목적이, 낮추시고, 시험하시고, 주리게 하심으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함이라 했는데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떡이 더 좋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모두 가짜인가요? 하나님은 이사야서에서 진짜 금식의 내용이 무엇인지 자세하게 밝히고 계십니다.

 

(58:4~8)

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5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 될 날이라 하겠느냐

6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 뭡니까? 자신을 스스로 괴롭게 하여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주리고 헐벗고 약한 자들을 내 것을 털어 섬기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삶에서 완전히 돌이켜 자기 이외의 다른 존재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삶, 자아가 비워지고, 자아가 죽는 삶을 금식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의 삶 속에서 잘 안 나오잖아요?

그럼 우리는 광야교회의 금식의 삶을 못 살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 구절들을 잘 보세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할 수 있는 자는 먼저 상기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자여야 합니다. 그가 먼저 그 능력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해야 하나님이 거기에 복을 주고, 능력을 더 붓는 방식으로 금식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에는 분명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다고, 명확하게 기록을 하고 있는데, 과연 그 누가 있어 스스로를 괴롭게 함으로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고, 모든 멍에를 꺾고, 흉악의 결박을 풀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겠습니까? 그러한 금식을 누가 하셨나요? 예수님이 그 분의 공생애와 십자가를 통해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40일 금식입니다. 40일은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을 함축한 상징적 기간입니다. 예수님의 40일 금식과 시험은 예수님의 전 생애를 요약하여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보다 먼저 낮추어 지셨고, 주리시고,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유일하게 그 주리고, 낮추어지고, 시험을 당하는 현장에서 하나님이 출제하신 시험지의 답안에 정답을 쓰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이렇게 신명기 8장의 광야 인생의 목적인 금식을 예수께서 온전히 성취하시고, 그 금식의 삶을 우리 성도들에게 전가시켜 주신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바로 그 예수의 금식을 내 것으로 거저 받아 금식을 한 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성도들은 또 다른 금식이 필요 없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게 새 술입니다. 생베입니다.

 

그러면 그 새 술과 새 옷의 주인공들이 일차적으로 누려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제 우리 신랑이신 예수님의 덕분에 더 이상 주리지 않아도, 금식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구나.’하며 신랑이 베푸신 혼인잔치를 즐기는 것입니다.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감격하는 것입니다.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신랑이신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깊은 것인지를 배우기 위해, 우리의 인생 속에서 연일 실패되어지는 금식의 삶, 즉 절대 주려 죽지 않고 있는 나의 옛 사람을 인식하고, 또 조금도 낮아지는 것 같지 않는 나의 옛 사람을 경험하면서, 왜 예수님이 우리에게 금식의 삶을 거저 주실 수밖에 없었는지를 배우고, 예수님의 주려죽음과 예수님의 낮추어지심을 믿음으로 면목 없이 붙드는 자기부인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에 대한 신뢰가 깎여갈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의 자격, 우리의 열심, 우리의 공로, 세상의 가치와 힘 등을 부인하고 부정하게 되는 것이며, 그 속에서 우리의 옛 사람이 서서히 주려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바리새인들이나 세례요한의 제자들처럼 열심히 노력해서 우리 옛 사람을 주려 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실패함으로 해서 옛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죽이시는 것이지요. 그게 새 술을 담은 새 부대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리를 하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폭로시키시기 위해 율법에 금식이라는 것을 명해 놓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일 년에 한 번 대 속죄일에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금식을 함으로 해서, 자신들의 처음 자리, 죽은 흙의 자리를 확인해야 했고, 그러한 처음자리의 현실을 직시함으로 해서, 하나님의 은혜만을 온전히 구하는 그러한 자리로 낮아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처음자리를 확인하기는커녕 오히려 금식 일을 하루하루 늘려가면서 자신들의 가능성을 자랑했습니다. 그러한 자기 영광 챙기기, 자기 가치 챙기기, 자기 자존심과 자랑 챙기기가 바로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한 더러운 이기의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들이 지켜야 할 진정한 금식을 예수의 삶과 십자가를 통해 온전히 이루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공짜로 금식의 삶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금식의 삶, 즉 광야의 삶을 통과해야만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신명기 8장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에 금식의 삶은 필수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금식의 삶을 주님이 거저 선물해 주신 것입니다.

 

금식의 삶은 말씀드린 대로 육의 죽음이라는 삶입니다. 그런데 그 육이 좀처럼 죽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사도 바울도 그의 사역 말미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라는 한탄을 했겠습니까? 하지만 성도는 이미 금식의 삶을 살기로 작정이 되어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삶 속에서 금식의 삶, 즉 옛 자아, 육의 죽음의 삶은 반드시 필연적으로 격발이 되어 나와야 합니다. 그러한 딜레마 속으로 하나님의 지혜가 가입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절대 금식의 삶, 옛 자아의 죽음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은 성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직까지 부활의 새 몸을 입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옛 자아를 주려 죽이는 금식의 삶에서 자주 실패합니다. 여전히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자랑하며, 자기만을 숭배하는 스스로를 발견합니다. 그때마다 성도는 고통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그러한 실패의 삶 속에서 사도바울과 같은 고통의 탄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그렇게 자신에 대한 신뢰와 기대를 조금씩 놓아갈 때, 그 안에 들어와 계신 예수가 그 옛 사람의 자리를 조금씩 차지하고 채우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이 금식의 삶을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폭로 당하는 자리에서 금식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실패만 했는데, 결국 그 공로가 우리에게 돌려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의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고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성도가 하는 일이라고는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통해서 자신의 처음 자리가 어떠한 자리인지를 확인하는 것뿐입니다. 그러한 실패와 좌절 속에서 성도가 겪어야 하는 자기부인의 삶이 금식의 삶으로 아름답게 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처음자리가 뭔지도 모른 채, 스스로 경건생활과 종교행위를 함으로 해서 하나님을 감동시키려 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누가 생베, 즉 새 천을 헌 옷을 깁는 데 쓰느냐?’하고 말씀하신 것이고,

누가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담느냐?’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새 포도주, 새 옷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게 되는 은혜의 복음,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말합니다. 신약 시대는 예수님의 은혜로 창조가 되고 은혜에 의해 경륜이 되어야 합니다. 그 새 포도주와 새 옷은 절대 헌 옷과 헌 부대(구약)와 조화가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새것은 헌 것을 파괴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 성전이신 예수님이 오시자 돌로 지어진 옛 성전이 파괴가 되고, 제사와 절기와 율법이 폐기가 된 것처럼 새것은 옛것과 절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생베는 헌옷을 찢어버리고, 새 포도주는 헌 부대를 터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고 하면서도 자꾸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고, 자신의 공로를 앞세워 잘난 척을 하고 있습니다. 선한 행실과 도에 지나는 헌신으로 개인과 교회의 명성을 높이고자 합니다. 그 어디에도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곳이 없고 사람과 교회의 이름만 드높이 날립니다. 다른 사람, 다른 교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한 번 돌아보자고요.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시는 목적이 뭡니까? 정말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입니까? 아니지요? 자기 자신, 그리고 자기 자신의 울타리 속에 감추어 둔 자기 자식, 자기 가족, 자기 재산, 자기 인기, 자기 명성, 자기 건강을 위해서 아닙니까? 그게 구약입니다. 헌옷이요, 헌부대란 말입니다. 그런데 은혜의 복음이 구약이라는 헌옷에 붙어 있고, 구약이라는 헌 부대에 들어가 있는 꼴이란 말입니다.

분명 우리 성도의 인생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는 것을 알게 하는, 목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하는데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의 떡이 더 좋고, 그 떡을 얻어내기 위해 나의 종교 행위와 나의 착한 행실을 보태고 있는 것 아닙니까? 왜 착한 일 하세요? 왜 교회 일에 열심을 내십니까? 천국 가려고 하시는 것이지요? 안 하면 괜히 찝찝하니까. 아니라니까요? 그건 예수님의 공로로 이미 성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그렇게 몰라요. 그러니까 목사가 은혜에 대해 설교를 하면 그러면 이제 아무 것도 안 해도 되겠네요?’하고 엉뚱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건 그동안 자신들이 해온 종교행위와 선한 삶이 성령에 의해 격발된 것이 아닌, 천국가기 위한 억지 행위였다는 증거 아닙니까?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이었단 말입니다.

 

우리는 천국가기 위해 선한 행위를 하고, 천국가기 위해 종교행위를 하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흙에 불과한 우리를 하늘나라 백성으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하나님이 너무 좋아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열심히 배우고 깊이 감격하자는 것입니다.

 

새 술, 새 옷은 그러한 구약 적 열심과 구약 적 축복 개념과 절대 섞일 수가 없어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구약의 금식을 파괴하시면서 세리와 죄인들, 창녀들과 포도주를 마시고 식사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건 율법에 의하면, 그리고 장로들의 유전에 의하면 돌에 맞아 죽을 짓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너희 선악의 구조로 사건과 현상을 판단하지 말라고 행동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경건한 종교행위와 엄격한 금욕생활을 하는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보다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세리와 창녀가 혼인잔치에 적합한 자들이라는 복음의 역설을 보여주시는 것이 이 새 포도주와 새 부대의 비유인 것입니다. 오죽하면 사도 바울도 내가 이제는 아무사람도 육체대로 알지않겠다고 고백을 했겠습니까? 그건 인간의 선악 판단의 기준으로 사람과 사건을 바라보지 않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바리새인들과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부당한 비방을 하는 것입니까? 남들은 다 금식라보지 는데 선생이라는 사람이 세리의 집에서 죄인들과 창녀들과 술을 마시고 밥을 먹고 있는 걸 비방하는 것이 잘못된 건가요? 인간의 선악구조에 의하면 그들의 비방이 옳은 것입니다. 제가 주일날 창녀들하고 선술집에서 소주한”바라보지 는 걸 의 선악구보았을 때 칭찬이 나오겠습니까? 비방이 나오겠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선악구조로 사람과 사건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 주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는 하나님만 판단하시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집단 학살을 선이라고도 하시고, 시 아버지와의 간음을 의라고도 하시는 것이고, 거짓말을 순종이라고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너희가 금식을 해야 할 날이 온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 때는 신랑을 빼앗겼을 때라는 것입니다. 신랑을 빼앗기는 날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날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날, 그들은 금식을 하며, 내가 예수를 죽인 죄인입니다, 라는 처음자리의 고백을 해야 했습니다. 그게 너희가 나를 빼앗길 때에 금식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그 십자가의 죽음에 내가 함께 동참하는 자로 서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금식이 되셔서 죽으신 그 현장에서 우리가 우리를 십자가에 매닮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처음자리, 죽은 흙의 자리를 인정하고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이 유월절이었지요? 그날은 이스라엘의 명절이고 잔치를 하는 날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율법 행위를 꾸짖고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 예수를 빼앗긴 날에 금식은커녕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그게 자신의 불가능함을 인정치 않는 세상의 죄악상인 것입니다. 나의 가능성과 나의 노력과 나의 열심을 인정해 주지 않는 자가 죽었으니 잔치를 벌이자는 것이지요. 그렇게 아담 속의 인간들은 자기 챙기기의 달인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도 너희들은 묵은 포도주를 좋아한다.’고 확정지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묵은 포도주는 율법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가시적 힘으로 주어지는 세상 적 축복을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묵은 포도주, 구약을 좋아합니다. 율법을 지켜 자기 의도 챙기고, 그로 말미암아 세상 힘도 챙기는 구약, 매력 있지요?

반면에 새 포도주를 좋아하는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새 포도주는 인간의 모든 가능성과 힘을 다 부수며 들어오기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은혜의 새 포도주를 싫어합니다. 그리고 새 포도주가 약속하는 것은 가시적으로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믿음의 눈으로만 보이는 영적 축복입니다. 그러니까 은혜의 새 포도주는 사람들에게 홀대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자들도 자꾸 자신들의 선한행위로, 자기의 평판이, 인기를 챙기려 하고, 세상의 힘을 얻어서 자랑스러운 자가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 새 옷과 새 포도주가 그 헌옷과 헌 부대를 어떻게 한다고요? 찢어발기는 것입니다.

 

(10:34)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4:12)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왜 이리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는지 아세요? 우리가 자꾸 헌옷과 헌 부대를 내어 놓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지도 못한 채 자신의 종교행위와 자신의 선행을 의지하고, 이 세상의 힘을 얻어 자신을 자랑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기에 복음이 우리 안에 들어와 포를 떠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옛 자아가 갈기갈기 찢어져야 우리에게 새 옷이 입혀지고,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인 새 포도주가 담길 새 부대로 우리가 바뀌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신랑을 빼앗기는 날, 즉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날에 금식하는 자, 다른 말로 그 십자가에 동참하여 죽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공로와 열심과 가능성을 부인하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분의 죽음을 보며, 이제는 더 이상 나의 열심과 공로를 부정하는 자가 없어졌다고 쾌재를 부르며 유월절 잔치를 치르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이해하고 그 십자가에 자신을 함께 못 박는 자, 신랑을 빼앗기는 그 자리에 바로 내가 가해자로 서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예수의 죽음에 동참하는 자가 하늘나라 백성인 것입니다.

신랑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여 신랑의 죽음에 동참하는 자들을 성도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자신을 죽여 가는 금식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고, 결국에는 세상의 떡이 아닌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힘이며 존재의 이유라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신랑이신 예수님에 의해 희비가 결정이 되는 어린양의 신부입니다. 신부는 신랑이 옷자락으로 덮지 않으면 신부의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그렇게 신부는 신랑에게 귀속이 되어 있는 자인 것입니다. 신랑이 금식하라면 금식을 해야 하는 것이고, 신랑이 밥 먹자고 할 때 밥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류의 역사는 전부 아담 안에서 신랑의 역할을 하려는 자들의 교만으로 점철이 됩니다. 피조물의 자리를 벗어나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서려하는 패역한 아담의 행적이 전 인류의 삶 속에서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어보겠다고 한, 아담이 그러했고, 자신의 제사 행위가 무시당했다는 것을 이유로 동생을 때려죽인 가인이 그러했고, 노아의 때, 바벨탑의 시대, 사사시대, 선지자의 시대, 오늘날까지, 모든 인류는 신랑에게 귀속 되는 신부의 역할을 마다하고 저마다 제가 신랑이 되어 자기를 우주의 중심에 두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구원을 얻을 교회를 여자의 후손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의 육의 상징인 남자를 기각시키고 육의 손길이 닿지 않는 여자를 통해 약속의 후손을 생산해 내시는 것입니다.

 

(3:15)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마귀와 여자, 즉 하나님의 백성들을 원수가 되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복음이 원시(原始)되고 있는 절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자인 교회가 마귀의 원수가 되어 하나님의 구원에 들어가게 되는가 하면, 여자의 후손이 마귀의 머리를 밟음으로 성취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여자가 낳은 여인의 후손이 태어나야 하고, 그 여인의 후손이 여자를 사망에서 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이 세상에서 여자의 역할로 살다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여자는 약한 자의 상징이요, 무력한 자의 상징이며, 순종해야 하는 자의 상징인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사도 바울이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5:22~25)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 지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신랑이신 주님이 신부인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주셨지요? 그 신랑의 사랑과 은혜를 아는 자들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살게 된다고요? 범사에 남편에게 복종하는 하나님 절대 의존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서 그러한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 신랑 절대 의존적 신부로 지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여자는 잠잠해야 하고, 가르치는 자리에 서지 말라는 말씀들이 등장하는 것은 여자와 남자의 우열을 정하고 차별을 해서 그러한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인 교회가 신랑인 하나님께 어떻게 복종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그러한맡은 여자가 실제로 순종의 삶러한살며 그 교회와 예수와의 관계를 배우라는 의미에서 그러한 말씀을 해 놓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남녀평등이니, 페미니즘이니 이런 것을 들어서 여권운동을 하는 것은 여전히 인본주의에 빠져 자기 가치 챙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의 우매한 행동인 것입니다.

좀 무시당하면 어떻고, 가치 없는 자로 살면 어떻습니까? 그냥 각자의 역할을 각자의 자리에서 충실하게 살아내면 되는 것입니다.

 

(딤전2:11-15)

11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12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14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그렇게 우리를 하나님의 진짜 신부로 만들어 내시기 위해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가 순종하는 여자의 모습으로 먼저 이 땅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신랑이신 예수가 우리를 신부로 만들어 내시기 위해 먼저 신부의 삶을 사셨단 말입니다. 그러한 여자, 교회가 겸손하게 낮아지고, 자신을 주려 죽임으로 해서 예수를 해산하고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족보에 여자 다섯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들 전부가 남자들을 살리는 자로 등장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래서 그 여자들 이름 뒤에만 ‘~에게서라는 단어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언약의 후손 예수를 잇는 주인공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의 모형으로 이 땅에 등장했던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1장을 보면 1절이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1:1)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여기에서 세계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헬라어 비블로스 게네세오스혹은 히브리어 엘레 톨르돌을 번역한 말입니다. 그 말은 창세기 24절의 하늘과 땅이 창조되었을 때 천지의 대략이 이러하니라라는 어절에도 쓰였고, 창세기 51절의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 하니라에도 똑같이 쓰였으며, 창세기 69절의 노아의 사적은 이러 하니라에도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어떤 혈통 계보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역사라는 의미로 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조부터 하늘과 땅의 역사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라 때마다, 지금까지의 역사의 내용과 의미를 바꾸어 놓을 만한 중대한 일,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이 표현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떤 중요한 변혁이 일어나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어로 1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먼저가 아니라 다윗이 먼저 나옵니다. 그리고 굳이 예수님의 족보를 14대로 억지 끼워 맞추기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억지로 끼워 맞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잘 세어보면 14, 15, 14대입니다.

사실 다윗과 바벨론 이거할 때까지 왕 족보에서 네 분이나 빠져 있습니다.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가 아니라 요람은 아하시야를 낳고, 아하시야는 요아스를 낳고, 요아스는 아마샤를 낳고, 아마샤는 웃시야를 낳고라고 해야 순서가 맞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나으니라라고 되어 있는 부분은 요시야는 여호야김을 낳고, 여호야김은 여고냐와 그 형제를 나느니라라고 해야 빠진 것이 없는 순서가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다윗에서 바벨론 이거할 때까지에서 왕 네 사람을 빼 버리고 의도적으로 14대 틀에 맞춥니다. 이왕 그렇게 할 것이면 왕 하나를 더 빼서 정확하게 14대로 맞출 것이지 왜 어설프게 중간을 15대로 해 놓았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열쇄는 다윗이라는 인물의 손에 쥐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이 마태복음 1장의 족보를 잘 보시면 거기에 등장하는 남자들이 거의 모두 왕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에게만 왕이라는 호칭을 붙입니다.

 

(1:6)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하나님은 지금 마태복음 1장의 전체 족보를 다윗이라는 이름에 맞추고 계신 것입니다. 14라는 숫자도 당시에 아라비아 숫자를 쓰지 않았던 히브리 사람들이 히브리어 자음으로 숫자를 대신하고 있었던 것을 감안하여 D(4)aV(6)iD(4), 즉 다윗을 숫자로 표기한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다윗이 뭔데 그렇게 예수님의 족보가 다윗이라는 인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일까요?

여러분, 유대인들의 민속메시아 사상에 의하면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그들에게 와서 무엇을 회복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요? 화려하고 찬란했던 다윗 왕국을 재건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지요? 그리고 그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라는 사무엘하 7장의 나단의 신탁을 확고히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다윗이라는 존재는 메시아의 조상이며, 그들이 원하는 이 세상 메시아 왕국의 왕의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관점에서 볼 때 다윗은 이스라엘이 되고 싶은, 이 세상 부귀영화와 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 다윗은 신부의 자리를 버리고 신랑으로 살고 싶은 모든 인류의 로망인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나 솔로몬, 그리고 다른 유대의 왕들은 모두 오실 메시아이신 예수의 모형이었던 것이었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오매불망 기다리던 다윗의 후손인 메시아의 족보에서 다윗 왕을 빼 버림으로 해서 참 메시아 상을 다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다윗처럼 대단한 업적을 쌓거나 공로를 쌓아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말로 신랑의 모습으로 구원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연약하고, 보잘 것 없으며, 신랑의 은혜가 아니면 존재가 불가능한 여자의 모습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족보에 엉뚱한 여자 다섯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여자가 다말입니다.

다말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하나님은 유다지파의 후손으로 메시아를 보내실 것임을 야곱의 유언을 통해 이미 밝히셨습니다. 그런데 그 유다의 아들들이 차례로 죽어 버린 것입니다. 유다는 시형제 결혼 법에 의해 막내를 다말의 남편으로 주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위하는 마음에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해 버립니다. 보세요. 남자는 하나님의 언약을 방해하는 자로 등장하고, 약하디 약한 여자가 창녀의 자리로 내려가 유다의 후손을 생산해 내는 것입니다. 그녀가 예수님의 족보, 예수님의 세계에 입적이 되는 것입니다. 유다가 다말의 불륜을 알고 어떻게 하지요? 율법을 쥔 자로, 심판자로 서서, 다말에게 화형 선고를 내립니다. 그게 아담 속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남자입니다. 신랑의 역할을 자처하고 나서는 악한 남자입니다. 그렇게 남자는 하나님의 언약에 방해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가 스스로를 괴롭혀, 창녀의 자리로 내려 간 여자에 의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여자가 자신을 낮추고, 주려 죽는 형국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언약의 후손이 이어집니다.

 

두 번째 여자가 라합이지요? 라합은 지난주에 설명을 해 드린 대로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인 가나안 여자입니다. 하나님의 덮어줌의 은혜를 이해하지 못한 함과 함의 아들 가나안의 후손에 의해 세워진, 애굽과 가나안이 샌드위치처럼 이스라엘을 감싸고, 이스라엘은 그 속에서 덮어줌의 은혜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자이며 창녀였던 라합이 자기가 속한 나라를 멸망시키러, 즉 자신을 죽이러 오시는 하나님께, 자기가 속한 나라를 팔아먹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이 저주받은 땅에 내려오셔서 자신을 향해 십자가를 들고 돌진해 오시는 하나님께 이 세상을 넘겨드리고, 그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지불하는 형국입니다. 자신이 속한 나라는 곧 자신의 목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율법 아래 오신 예수가 율법의 나라를 하나님께 팔아넘기고 열두 지파로 상징되는 교회를 살려내는 것입니다. 이 세상 왕국에 선한 사마리아 인처럼 이방인으로 내려오신 예수에 의해, 세상의 원수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에 의해, 죽어야 할 정탐 군과 이스라엘의 열두지파, 남자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여자가 룻이지요? 룻은 어디 사람입니까? 모압 여자입니다. 모압은 하나님에게 영원한 저주를 받은 나라입니다.

 

(23:3)

3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대 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그러한 저주받은 나라, 모압 여자 룻이 다윗의 할아버지 오벳을 낳는 것입니다. 룻은 나오미의 며느리입니다. 나오미의 남편은 엘리멜렉이지요? 그 뜻은 왕의 하나님혹은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이름으로만 보면 굉장히 경건한 것처럼 보이지요? 그런데 행동은 완전히 딴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흉년이 들자 하나님을 왕으로 삼고 사는 자 답지 않게, 오직 먹고살겠다는 일념하나로 저주받은 나라 모압으로 이사를 갑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기각해 버립니다.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라는 너스레, 그의 고백과 그의 삶 전체를 받아들이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압 땅에서 그를 죽여 버리십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 또한 다 죽여 버리십니다. 신랑들, 남자들이 다 죽은 것입니다. 육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이제 나오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 훼방을 놓으시는 하나님으로 밖에 여겨질 수가 없습니다. 오죽하면 그녀가 자기 이름을 마라로 바꿉니다.

 

(1:20)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그런데 룻이라는 저주받은 이방 여자가 그렇게 자기를 괴롭히는 하나님에게 스스로 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라합의 아들 보아스를 만나 예수님의 세계를 잇는 것입니다.

 

네 번째 여자는 밧세바입니다. 그런데 족보에 밧세바의 이름이 안 나오고 우리야의 아내라고 표기가 되어 있습니다.

 

(1:6)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이 것은 밧세바라는 여자가 우리야를 함의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다윗이 빠지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여자는 하나인데 남편이 둘이 등장합니다. 둘 중 하나는 빠져야 하지요?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임신을 시킵니다. 그런데 그렇게 태어난 아기는 곧 하나님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다윗은 그 일로 인해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죄 사함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죄는 자신이 지었는데 성전(聖戰)을 치르던 무죄한 우리야와 무죄한 아기가 대신 죽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용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를 만나고 자신의 죄를 깨달은 후에 지은 시편 51편으로 가보겠습니다.

 

(51:7~8)

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8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보세요. 세상의 선악 구조에 의하면 죄를 지은 자가 벌을 받고 그리고 용서가 와야 합니다. 그게 구약입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자를 대신해서 무죄한 이가 죽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다윗의 죄로 인해 다윗의 뼈가 꺾여 져야 하는데 다윗의 죄로 인해 피해자인 우리야와 아기의 뼈가 꺾이고 다윗이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은혜의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야는 다윗의 죄를 짊어지고 죽은 예수를 상징하는 이이며, 아기 또한 다윗의 죄가 되어 죽은 예수의 모형인 것입니다. 그 전체를 밧세바라는 여자가 품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구원을 위해 부정한 신부가 되어버리는 밧세바. 그녀에 의해 다윗이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배운 뒤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용서를 받은 다윗에게서 솔로몬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아벨의 라인을 잇는 셋이 나와 아벨의 자리를 메우는 것처럼, 다윗이 죽인 우리야와 아기 대신에 솔로몬이 태어나 예수의 역할을 한 우리야를 잇는 것입니다. 거기서 인간 다윗은 죽고, 다윗이 우리야의 꺾어진 뼈의 공로로 우리야 화되는 것입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은 죄인 다윗, 인간 다윗의 아들이 아니라 우리야의 자리를 잇는 우리야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삼하12:24~25)

24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츟하였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25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 이더라

 

보세요. 분명히 솔로몬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굳이 다른 이름을 붙여 주십니다. 그 이름이 여디디야입니다. 여디디야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솔로몬은 다윗과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에게서 나온 불륜의 자식이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의해 예수의 역할을 한 의인 우리야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되셔서 예수가 죽었는데 예수에 의해 우리가 창조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작은 예수로 여김을 받지 않습니까? 그래서 죄인 다윗이 우리야의 죽음으로 우리야로 편입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밧세바라는 여자는, 다윗이라는 죄인 남편에 의해 좌절될 뻔한 약속의 후손의 라인에 뛰어들어 자신이 부정한 여인이 되어서 예수라는 후손을 잇는 자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의 후손 예수의 세계, 14, 다윗 왕 등으로 강조가 된 인간 다윗, 구약의 다윗은 하나님에 의해 기각당하고, 다윗이라는 모형이 상징하고 있던 예수가 다윗의 후손 솔로몬이 태어나는 방식으로 이 땅에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족보에서 인간 다윗이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구약이 기각되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이시며 새 옷이신 예수에 의해 다윗이라는 구약이 찢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15대임에도 불구하고 14대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오는 여자가 마리아입니다. 잉태할 수 없는 처녀 마리아가 보이지 않는 성령에 의해 잉태를 합니다. 마치 죽은 우리야가 없음의 상태에서 솔로몬이라는 영적 계보를 이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 ‘없음과 방불한 성령에 의해 진정한 다윗의 후손인 예수가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마리아가 잉태했다는 사실을 알고 종용히 그녀를 끊으려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전부 약속의 후손의 잉태에 방해꾼으로 등장을 하고, 여자들이 희생을 감수하며 약속의 후손을 잇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의 삶이었고, 이 땅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신부인 교회의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무력한 자리, 연약한 자리, 부정한 자리, 이방인의 자리, 노마드의 자리로 내려갈 수 있는 자로 성숙이 되어져야 하는 것이지, 자신의 뜻과 목적을 위해 하나님을 부리는 자리로 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온전한 신부의 삶이 예수에 의해 설명이 된 것이고, 우리 성도는 모두 다 그렇게 보잘것없고, 부정하고, 무력하고, 더럽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약속의 후손을 생산해 내고야 마는 하나님의 신부로 이 땅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신랑을 잃은 신부들의 금식의 삶인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첫째 남편인 율법과 이혼하고 진짜 남편인 예수와 혼인을 하여 새로운 부활의 몸을 입은 작은 예수를 생산해 내는, 다른 말로 예수와 연합된 자로 완성이 되는 삶을 이 광야와 같은 역사와 인생을 통하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삶이 옛 사람이 주려 죽는 금식의 삶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힘이 든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되어 하나님의 은혜로 종결이 됩니다. 그래서 이 비유 앞에 문둥병자가 낫고, 중풍 병자가 낫는 그림이 이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그들은 그냥 부정한 자들인데 예수님이 은혜로 일으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은혜를 배우세요.

 

(벧후3:18)

18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1. 15
    May 2014
    23:00

    서머나가족캠프 최종 공지^^~

    Category서울서머나교회소식 Byseoulsmyrna Views14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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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11
    May 2014
    12:05

    그 동안 홈페이지 접속에 어려움이 있었던 점을 사과드립니다.

    서울 서머나교회 미디어팀입니다. 4월 말부터 홈페이지 접속이 원활하지 않았던 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내부적인 요인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물리적인 원인이 발생하였고 이에 몇일동안 복구작업을 통해 정상화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익스플로러 환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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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30
    Mar 2014
    23:44

    제 2회 서울서머나교회 가족캠프

    - 제2회 서울서머나교회 가족캠프 확정공고 1.일시:2014년 5월 24일(토)오후2:00까지 캠프도착, 오후3:00부터~5월 25일(일)오후1:00까지(1박2일) 2.장소: 광림수도원(www.klpm.net)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추자리 525-4. 전화:031-766-4917-8 3.접수기간 :금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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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30
    Mar 2014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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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19강~21강

    로마서(19) 로마에 가고 싶다 (롬1:11-15) 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 형제들아 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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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30
    Mar 2014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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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비유9강~11강

    비유9.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마7:21~29) 7:21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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