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로마서(16)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오는 은혜와 평강(II)

 

(1:7)

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몇 주째 로마서 17절에 머물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와 평강의 정체에 관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와 평강을 이야기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정말 거기에 대해 무지하며 관심도 없다는 생각이 더욱더 확고해 질 뿐,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이 하신 일로 말미암아 정말 은혜를 감지하고 그 속에서 평강을 누리는 이는 참으로 드물다는 생각만 깊어집니다. 그러면서 문득 떠오른 책이 작년 이맘때쯤 읽었던 장 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책이었습니다. 그 처연하고 이기적이며 무신론자인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평생 인간 존재의 가치에 대해 설파하고 간 사람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존재 가치를 챙겨야 하는 존재이고, 자기 존재 가치를 챙길 수 있는 존재이며, 자유의지에 의해(그걸 인격성이라 표현) 그 존재가치 챙기기에 기투(企投)를 하며 사는 존재라는 것이 그 책에서의 사르트르의 주장의 논지입니다. 기투는 인간 스스로의 결단과 선택, 그리고 자발적인 감정적 반응 등의 행위를 말합니다. 원래 기독교 문명 하에서의 인간들의 현실 인식은 피투성(被投性)입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 모든 것이 경륜이 된다는 현실 인식이 피투(被投)입니다. 그걸 굳이 기독교적 용어로 바꾸면 작정, 예정, 섭리, 등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휴머니즘의 전도사를 자처한 사르트르에게는 그러한 피투의 인간 현실 인식이 마뜩치 않았던 것입니다.

원래 실존주의는 기독교에 대항하여 나타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휴머니즘적 실존주의는 당시 허무주의로 흘러가던 자연주의에 대한 반발, 혹은 강화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자연주의라는 것은 초월적인 존재나 초월적인 영역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사상입니다.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과 하나님 나라 사상을 완전히 부정하는 그런 사상입니다. 모든 것은 물질에서 시작하여 물질로 끝이 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물질인 인간이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바로 소멸이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연주의자들에게 최선의 것은 이 세상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물질이므로 반드시 원인이라는 것에 의해 결과가 맺어진다고 믿습니다. 결과라는 열매에 어떤 초월적인 존재나 영역의 간섭이 작용할 수 있다는 여지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입니다. 뿌린 대로 거두고 심은 대로 난다는 것이 자연주의의 모토라 할 수 있습니다. 자연주의 속에서의 인간은 어떤 법칙 속에서 수동적으로 끌려 다니는 허무한 존재입니다.

그렇게 자연주의자들에게는 물질세계인 이 세상이 전부인 것이며, 역시 물질인 인간들이 합의하고 결정해 놓은, 이 물질세계 속에서의 성공을 위해서는 인간들이 구축해 놓은 성공하는 방법을 잘 따르고 사용해야 잘 사는 것이라는 공식이 서게 되는 것입니다. 가끔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너 그런 식으로 살아서 어떻게 밥 먹고 살 거야?’하고 야단을 치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인과의 공식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 공식을 따라 열심히 살면 반드시 풍요롭고 만족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인간들은 그러한 자연주의의 울타리 속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열심히 물질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실존주의는 그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그리 다르지 않은 대동소이한 사상입니다. 실존주의는, 자연주의자들처럼 인간을 그렇게 법칙 속의 수동적 존재로 인식을 하게 되면 쉽게 허무주의에 빠질 뿐 아니라 경험적으로 볼 때 그러한 관념이나 사유의 공식에 맞아 떨어지지 않는 실제적 현실이라는 것이 있음을 간파한 이들의 좀 더 희망적이고 미래 지향적이며 낙관적으로 진일보한 사상입니다. 휴머니즘의 강화.

인간은 어떤 인과의 법칙 속에 갇혀 있는 화석 같은 존재가 아니라, 인격성을 발휘하여 결단과 선택, 그리고 감정적인 반응을 하면서 도출될 결과의 원인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기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존주의는 자연주의와 마찬가지로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물론 유신론 적 실존주의학파도 있지만) 오히려 인간의 존재가치 챙기기에 더욱더 혈안이 된 괴물과 같은 모습으로 보편적 인간들의 관념과 사유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러프하게 말하면 실존주의는 자연주의의 울타리 속에서, 혹 인간존재 가치의 허무함에 빠져서 자기존재에 대해 절망하게 될 어떤 이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실존주의는 자연주의에 반발을 한 것이 아니라 휴머니즘적 차원에서 더욱더 확실하게 강화를 한 사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악과를 따먹은 모든 인간들은 어떻게 해서든 신을 부정하고 싶어 하고, 이 물질 세계를 가치 있게 상정(想定)하려 합니다. 인간이 신을 부정한다는 것은 뒤집어 보면 자기 자신의 신이 되고 싶어 하는 욕구를 들키는 것입니다. 내가 신인데 또 다른 신이 있으면 안 되잖아요? 그렇게 신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들의 마귀 적 추구가 아주 잘 그려져 있는 곳이 요한계시록 13장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666에 관한 이야기가 자세하게 적혀 있는 장입니다. 거기에는 악의 원흉으로 불리는 용과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등장을 합니다. 그런데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죽었다가 살아난 것처럼 연극을 하고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그 죽었다가 살아난 것처럼 연극을 하는 바다짐승을 경배하게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경배를 유도하냐면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등의 이적과 기적을 통하여 경배를 유도합니다.

정확하게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모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세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하나님이 누구이신지에 전혀 관심도 없는 사람들, 예수의 은혜로 죄에서 해방이 되었다고 입만 열면 열변을 토하는데 도대체 왜 그분이 자기를 위해 죽어야 했는지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관심도 없는 사람들, 그러한 가짜 하나님, 가짜 예수님을 경배하게 하기 위해 동원되는 기적과 이사들, 너무 똑같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그러한 마귀의 세력이 어디에 들어와서 사람들을 미혹하겠습니까? 마귀가 가짜 하나님 흉내를 내는 곳이 어디죠? 절입니까? 이슬람 사원인가요? 아닙니다. 예배당입니다. 마귀의 하나님 흉내는 예배당에서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마귀가 예배당까지 들어와서 하나님 흉내를 내는 이유가 뭡니까? 인간들이 진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려고 예배당에 들어와서 가짜 하나님 흉내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다른 말로 인간의 신 됨을 구축해 주기 위해 가짜 하나님을 조작해서 인간들에게 던져주고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마귀는 예배당에 들어와 외칩니다. ‘인간아 네가 신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너의 신 됨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 이용해 먹기만 하면 되는 거야그러니까 다들 열광하는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저마다 자기가 신이 되어 오히려 하나님의 섬김을 받겠다고 하는 것이 선악과 따먹은 아담들의 세상입니다. 마귀는 신본주의의 천국을 인본주의의 지옥으로 바꾸어 버린 세력입니다. 마귀는 인간들이 예배당에서 하나님이라는 이름과 예수님이라는 이름, 그리고 성령님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부르도록 놔둡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을 인간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인간 섬김 이로 둔갑을 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그 짐승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매매를 하지 못한다, 즉 경제활동에서 손해를 보게 된다고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3:16-18)

16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 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륙 이니라

그러니까 마귀는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의 관념과 사유를 장악하여 초월과 초월자를 부정하게 하며 자신의 현실과 실존에만 집중을 하게 하여 그러한 현실 속에서 신이 되고자 열심히 기투의 삶을 살게 만드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을 조작하고 세상에서는 진리를 조작합니다. 그렇게 하여 인간들을 파멸의 길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18절을 보시면 지혜를 받은 자, 총명이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셀 수 있다고 합니다. 그건 멋지게 하나님 흉내를 내고 있는, 진리의 흉내를 내고 있는, 짐승의 정체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게 지혜를 받은 자, 즉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역사와 인생의 목적을 믿음 안에서, 말씀을 통하여,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러한 마귀의 속임수를 간파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3:5-8)

5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 된 말 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 하더라

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보시는 것처럼 창세전에 하나님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사람들만 짐승의 속임수에 속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짐승이 세워 놓은 공식 속에서 더하기 빼기의 삶을 살아가는데 생명책에 녹명이 된 사람들은 그 공식 속에서 빠져나와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만이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인데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17절에서 짐승에게 경배를 하지 않는 자들은 어떻게 된다고 했지요? 이 자본주의의 세상 속에서 매매를 못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건 곧 자본주의 속에서의 육적자아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이들을 가리켜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짐승의 표 말고 다른 표를 받았다는 것인데 그게 어떤 표일까요?

(7:4)

4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계시록 13장과는 반대로 여기에는 하나님의 표를 받은 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이 바로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도록 결정이 된 자들인 것입니다. 에스겔서 9장으로 가면 그렇게 하나님의 표를 받은 이들이 세상을 어떻게 분별하는 지가 나옵니다.

(9:4)

4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하나님의 표를 받는 이들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부정하게 만드는 짐승들의 세속주의와 성공주의, 인본주의, 자본주의를 바라보면서 탄식하며 우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짐승의 궤계를 알아차립니다.

 

그런데 계시록 13장에 보면 그렇게 인간들에게 마귀의 표를 찍는 짐승의 수를 666이라고 하고 그 수가 바로 사람의 수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18절을 다시보세요.

(13:18)

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륙 이니라

그렇죠? 그러니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부정하게 하고, 이 세상이 전부이며,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진짜 성공하는 삶이며 승리하는 삶이라는 것을 부추기며 조장하는 마귀의 세력이 사람이라는 존재의 보편적 성향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게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하나님처럼의 욕망이었잖아요? 아담과 뱀이 꼭 같은 생각을 하는 존재로 합일이 되지 않습니까? 인간 안에 마귀의 세력이 산다는 증거를 대드리겠습니다.

(8:33)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 하는도다

하시고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 한다는 말을 하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었습니다. 절대로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왜요? 하나님 나라는 보이지 않는 나라이니까 거기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살아서 이 세상 속에서 자기들이 주인공인 지상 천국을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다분히 자연주의 적이며 실존주의 적이며 실용주의 적인 발상입니다.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는 영원히 지속되어야 한다는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이 떠오르지 않으세요? 당시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을 논평한 시카고 트리뷴지의 예언처럼, 역사는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의 마지막 대목을 마치 위대한 잠언처럼 붙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주장을 사탄의 주장이라고 평가를 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사람을 위한, 사람에 의한, 사람의 정부는 마귀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정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이 부정되고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부인당하고 부정당하는 피투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기투를 한다고 해도 하나님에 의한 피투 속의 기투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노예를 해방하고 모든 이가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추구하고 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의 나라소망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노예들에게 종들아 주인에게 하는 것을 예수님께 하는 것처럼 하라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주님은 그러한 베드로를 사단이라고 부르신 뒤 그의 행사가 사람의 일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단과 사람의 세속적 욕망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내안에 마귀가 있다는 말입니다. 잘 새겨들으세요. 성령이 거하시는 내 안에 마귀라는 존재가 살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닌 라는 신의 욕망에만 집중하여 사는 마귀 적 성향이 내 안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걸 거시적으로 표현할 때 그냥 마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곧 마귀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6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창조의 수 7에 하나 못 미치는 숫자입니다. 하나님과 하늘에 이르려고 하는 인간들의 집요한 욕망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하늘의 수 7 바로 밑에 까지 치닫고 올라옵니다. 그러나 절대 하나님의 수에는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 6이라는 숫자는 피조물인 사람이 이 세상의 자원과 자신의 힘으로 신이 되고 싶어서 발광을 하는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이 되고 싶어서 발광을 하지만 절대로 스스로의 힘이나 세상의 자원으로 신의 자리에 오를 수 없는 선악과 따먹은 인간들의 마귀 적 성향을 삼위 하나님의 숫자 3과 조합하여 666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666은 인간의 자기 확인, 자아성취, 자아실현, 성공, 번영, 고지점령, 승리에의 욕망을 기가 막히게 표현한 숫자인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777로 존재하시는 것이고요. 당시 고대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을 777이라는 숫자로 표기를 했었습니다. 따라서 666은 하나님 아래의 최고의 숫자인 것입니다. 최고가 되고 싶은 인간들의 마귀 적 집념과 집요함.

 

그런데 중요한 것은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우리 성도의 삶이 666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철장과 가시와 담을 가지고 내려오셔서, 육신 안에 갇혀서 이 세상 나라에서 세상의 힘을 얻어 세상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그 나라에서 꺼내십니다. 가시로 막고 담으로 막으시며 철장으로 부수십니다. 그걸 구원이라 합니다.

(18:4)

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하나님은 마귀가 조종하는 힘의 원리의 이 세상 나라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이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은 보신탕집에 액자로 걸릴 그런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천하를 얻으려는 그 시도 자체가 목숨을 잃는 일이니까 그 세상 나라에서 벗어나라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일갈인 것입니다. 사람이 주인공인 나라는 절대 행복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서로가 주인공이 되려하는 그 욕망들이 이내 다툼과 시기와 질투를 쏟아내어 그곳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이 주인공이며, 하나님이 왕이신 나라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어 하나님께 바치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고전15:24-25)

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

예수님께서 모든 악의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어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시지요?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주인공이신 나라여야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때까지 예수님께서 불가불 왕 노릇을 하신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불가불이라는 단어는 ‘must, 반드시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그리고 그 시제가 현재시제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 속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시며 왕 노릇을 하신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왕이 다스리는 우리의 인생이 참 우리의 기대에 못 미치지요?

 

지금부터 잘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삶에 세밀하게 개입을 하셔서 당신의 백성들의 삶 속에서 성취해 내셔야 할 것이 무엇이라 했습니까? 선악과 따먹은 아담 군상들이 자신들의 꿈과 비전과 계획과 지혜와 힘을 바탕으로 건축하는 세상 나라의 헛됨과 악함을 깨닫게 하시고 그 나라에서 건져내시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왕으로 간섭하셔서 우리를 어떻게 통치해 나가시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고립시키시고, 망하게 하심으로 정을 떼게 하시겠지요?

 

예수님께서 우리 삶의 왕이 되셔서 우리를 이 세상에서 건져내시는 일을 하고 계실 때 마귀의 나라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세요. 다시 계시록 13장으로 갑니다.

(13:7)

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짐승이 마흔 두 달 동안, 즉 전 역사에 걸쳐서 성도들을 이기게 된다고 합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왕으로 간섭하시는 성도의 인생은 마귀에게 지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마귀가 성도의 천국행을 방해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이 세상의 힘으로 성도를 눌러 이긴다는 그런 말입니다. 쉬운 말로 성도는 이 세상의 힘으로 자신을 자랑하거나 영광을 챙기는 삶을 살 수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몽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살진 암소 일곱 마리를 흉악하고 파리한 암소가 잡아먹습니다. 그리고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세약하고 마른 일곱 이삭이 삼켜버립니다. 그것은 단순히 7년 풍년 뒤에 7년 흉년이 올 것이라는 추수에 대한 예언이 아닙니다. 그 꿈은 메시아를 모형하고 있던 요셉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던 것이고,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을 예고하는 것이었으며, 예수 안에서 구원받아 이 세상 속에서 역사를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을 가리키던 것이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마귀가 힘으로 이기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였잖아요? 마찬가지로 바로 그것이 하늘 왕의 왕 노릇 하에서 그 왕의 통치를 받고 있는 하늘 백성들의 현실입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그렇게 무장해제를 시켜 세상 속에서 부정해 버리시겠다는 거룩한 언약 적 의지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래서 짐승을 시켜 성도를 이기게 하시고 포로로 잡아가게도 하시고 칼로 죽여 버리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 밑의 9절과 10절이 개역 성경에는 좀 이상하게 번역이 되어 있어서 누가 사로잡혀 갈 것이고 누가 칼에 죽게 되는 지가 좀 모호한데 표준 새 번역으로 보면 사로 잡혀가고 칼에 맞아 죽어야 할 자들이 누구인가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13:9-10)(표준 새 번역)

9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십시오

10 사로잡혀 가기로 되어 있는 사람이면,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맞아서 죽임을

당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이면, 칼에 맞아서 죽임을 당할 것이다.”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필요 합니다

포로로 잡혀가게 되는 일과 칼에 맞아 죽는 것을 경고하면서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을 요구하지요? 그렇다면 누가 포로로 잡혀가고 누가 칼에 맞아 죽는다는 말입니까? 성도입니다. 그게 하늘의 왕이신 예수님의 통치 속에 들어있는 성도의 세상 속 현실입니다. 10절의 사로잡다라는 단어는 포로가 되다라는 뜻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포로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가는 것은 곧 칼에 맞아 죽는 것입니다. 성도의 현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에서는 성도를 항상 환난에서 나오는 자(환난을 당하는 자), 바벨론 성 길에서 죽는 자, 순교자등으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빌레몬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그러한 성도의 현실을 예수님의 포로가 된 자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예수님의 포로가 된 자들의 삶에 은혜와 평강이 있다는 역설의 인사를 합니다.

(1:1-3)

1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2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

오늘 본문의 말씀과 똑같은 인사의 말을 하는데 그 배경이 참으로 인상 깊습니다. 빌레몬서는 옥중서신입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옥중서신이라고 하지요? 바울이 감옥에서 쓴 서신이라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1절을 보시면 사도 바울이 자신을 가리켜 예수의 포로라고 부릅니다. 개역 성경에는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어로 보면 데스미오스 크리스투 예수‘prisoner of Jesus Christ’입니다. ‘prisoner for Jesus Christ’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예수님의 포로가 되어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신에게 은혜와 평강의 현실이 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상황 속에서 은혜와 평강을 전하고 있지요.

예수님의 포로라는 말은 바울과 예수님 사이에 전쟁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기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누구의 포로요? 예수의 포로요.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의 현실을 예수님께서 자신을 이기심으로 자신을 포로로 잡아 자신을 통치하고 계신 것으로 이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이요, 그러므로 자신에게 평강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감옥 속에서 이구동성으로 찬송을 했지요? 그게 그러한 믿음 안에서의 현실 이해에서 비롯된 것들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구속사 속에서의 포로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고 가야 합니다. 구속사 속에서의 포로라는 개념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 적 저주의 현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패역함을 다스리시기 위해 항상 주변의 다른 나라와 민족들을 들어서 쓰셨습니다. 애굽,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미디안, 블레셋, 메소보다미아, 모압, 암몬, 아람, 로마, 등등의 나라를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게 하셨고 그들의 포로가 되게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2:13-14)

13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1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그들로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

이렇게 구속사 속에서의 포로란, 하나님의 언약 적 저주의 심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서 매번 한 게 뭡니까?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이지요? 여기는 사람 살 데가 못 되니 제발 좀 여기서 나가게 해 달라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구원자를 보내셔서 그들을 건져 내십니다. 그러니까 포로 생활이란, 하나님이 통치하시지 않는 나라의 추악함과 헛됨과 고생됨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집중하는 데에 소용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약 적 저주의 심판으로 다른 나라에 포로로 보내버린 사람 중에 그 나라가 너무 좋아서 나중에 포로 귀환 행렬에서 빠져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에게는 포로 생활이 처절하고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감지가 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달콤하고 편안하고 풍요로운 것으로 감지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 적국에 남아 자기의 나라로 귀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포로 생활의 고통을 감지하고 자기 나라로 귀환하게 되는 자들을 남은 자라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남겨 놓은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오직 그들만이 하나님 나라 이외의 나라에서의 포로 생활의 실체를 올바로 인식할 수 있는 눈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포로 생활이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부추와 마늘과 고기가 풍성하고, 하는 일마다 잘되고, 건강은 항우장사가 부럽지 않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외모에, 인기와 명성도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이가 그 생활이 고통스럽다고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가 있을까요? 그러한 이들은 날 좀 건져 달라는 부르짖음이 아니라 여기가 좋사오니하면서 자자손손 그 나라에서 살게 해 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성도가 그러한 자들을 바라보면서 어떠한 마음이 들겠습니까?

(73:2-5,12)

2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 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4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5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12 볼 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이게 하나님이 포로 생활의 비참함을 깨달으라고 보냈더니 여기가 너무 좋아요하면서 하나님 나라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는 자로 살아가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성도들은 그들을 보면서 매일같이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 믿는 유익이 뭐냐는 것이지요? 왜 눈에 보이는 유익이 나타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도의 포로 생활은 어떻습니까?

(73:13-14)

13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보세요. 성도는 이 세상에서 진짜 포로의 삶을 처절하게 살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지요? 성도를 통치하시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신 하늘의 왕, 예수님께서 그를 포로로 잡고 계시기 때문에 성도는 이 마귀의 나라에서 절대로 편안한 삶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옥에 포로로 갇혀 있던 바울이 자신을 가리켜 예수님의 포로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바울은 예수님에 의해 포로로 끌려가던 사람이었지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던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바로 그러한 성도의 포로 됨의 현실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1:18)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여기에서 띠 띠우다라고 번역이 된 조세이라는 단어는 꽁꽁 묶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꽁꽁 묶여서 끌려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그렇게 질질 끌려서 어디로 가게 됩니까? ‘라는 존재의 하나님처럼의 삶을 추구하던 마귀의 나라에서 아들의 나라, 하나님 나라로 옮겨 가게 되는 것입니다.

(1:13)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68:17-18)

17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 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

18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 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하심이로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묘사하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끌고 나오시는 모습을 사로잡은 자를 끌고라고 묘사를 합니다. 그 말을 직역을 하면 사로잡은 포로를 거느리시고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의 인생은 예수님에게 사로 잡혀서 자기가 원하는 이 세상 힘의 나라에서 질질 끌려 나와 자기를 부정당하고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는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포로로서의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의 심판을 받고 마귀의 나라로 잡혀 온 포로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한쪽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이 어둠의 나라의 실체를 올바로 자각을 하게 되어 하나님 어서 저를 좀 빼내 주세요라는 부르짖음을 토해 내게 되는 반면 다른 한쪽은 마귀 나라의 삶의 방식과 원리와 자원이 너무 좋아서 마귀와 한편으로 살고 싶어서 마귀의 포로가 되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포로인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진짜 전쟁 포로처럼 살게 되는 것이고 불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왕이 되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는 자들로 끝까지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다윗의 시편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인용을 합니다.

(4:7-8)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여기서도 역시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포로로 사로잡고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예수님의 포로가 되어 이 세상 속에서 처절한 포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그 포로의 현실을 이렇게도 묘사를 합니다.

(고전4:9)

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여기에서 미말이라는 것은 개선 행진을 하는 승전국의 왕 맨 뒤에서 질질 끌려가면서 왕의 승리를 더욱더 돋보이게 하는 적국의 포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들은 조롱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했으며 돌에 맞고 수모를 당했으며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세상 속 현실을 그러한 포로의 현실로 인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뿐 만아니라 당신이 택하신 모든 사도들을 그렇게 취급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입니다.

우리안에는 여러분과 저도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에도 똑같은 말이 나옵니다.

(고후2:14)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여기에서 이기게 하시고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드리암뷰오인데 그 단어는 왕의 개선 행진에 참여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왕의 승리의 개선 행진에 포로로 미말에 참여하여 왕의 승리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이 바로 성도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뒤에 있는 냄새라는 단어가 그러한 해석을 뒷받침해 주는 단어입니다. 냄새는 개선 행진에 피웠던 향냄새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고대시대 사람들은 왕이 승리를 하고 돌아올 때 향을 진하게 피워서 그 냄새로 왕의 개선행진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우리를 가리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는 자라고 합니다. 그 말은 우리가 바로 왕의 승리를 축하하는 향이라는 것입니다. 그 향냄새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냄새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흠향하시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재물의 향이 바로 성도의 그러한 삶을 모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승리를 확증하는 연기였습니다. 제물이 제단에서 불탐으로 말미암아 연기와 향이 난 것은 하나님,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고 하나님에게로 종결이 되는 것입니다. 항복!’이라는 성도의 항복 선언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를 태우지 못하고 정결한 제물을 태우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 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열심 앞에서 완전히 부정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만이 오롯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일 먼저 그러한 하늘나라 백성의 삶을 살아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제단에서 불태워졌던 제물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포로가 되셔서 당신을 비우시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미말에 두시고 세상의 구경거리를 삼으신 첫 번째 하늘의 포로였습니다.

(5:2)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여기에도 향기라는 단어와 냄새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제단의 냄새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도 똑같은 삶을 요구하십니다.

(12:1)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에서 제사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원래 제물이라고 했지요?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태워 왕의 개선행진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포로의 삶을 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아니 그건 우리가 선택할 사항이 아니라 필연적이며 의무적인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고후2:15-16)

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개선행진의 미말에 서서 승리하신 왕의 영광을 돋보이도록 부름을 받은 하늘의 제물들의 삶이 이 세상 속에서는 비참한 포로의 삶으로 보여 지게 된다고 했지요? 그럴 때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 받지 못한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어떻게 생각할까요? 참 지지리도 복도 없다고 하겠지요? ‘네가 믿는 예수가 너를 그렇게 놔두는 것을 보면서도 그 예수를 계속 믿겠다고?’하면서 성도와 그를 붙들고 계신 예수를 조롱할 것입니다. 그게 사망의 향기입니다. 성도의 삶을 보며 그러한 세상 적 평가를 하는 자들은 다 사망에 떨어져 죽습니다. 그들에게는 진짜 현실을 보는 눈이 없는 것이고 그러한 자들은 믿음을 선물 받지 못한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다른 이들의 상황이나 처지를 보면서 함부로 평가하지 마세요.

반면에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 받고 이 역사와 인생의 목적을 분명하게 깨달은 이들은 그러한 성도의 삶을 보면서 이 마귀의 나라의 실체를 보게 되고 이 나라에서의 탈출만이 살길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것이 생명에 이르는 냄새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이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포로가 되어 예수님께서 꽁꽁 묶어 끌고 가시는 곳으로 끌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곳은 이 세상 아담 군상들이 정말 싫어하는 자기부인의 나라요 비워짐의 나라요 섬김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을 향한 연정이 끊겨지는 포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이 세상 나라에서의 성공과 번영의 이해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갖게 되는 것이고, 그들의 삶 속에서 비로소 평강이 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나는 내가 이 세상 나라에 버리고 가야 할 것들, 두고 나가야 할 것들을 갖고 일희일비하면서 살았구나, 이제 이 역사와 인생의 목적에 대해 분명하게 알았으니 이 세상의 힘의 공식 속에서의 소유나 자원이나 인기나 평판에 자유하자하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의 삶이고, 도피성 안에서 보호받고 있는 자들의 지향성인 것입니다.

 

지난주에 도피성에 관한 설교를 했지요? 그 설교를 들으신 어떤 분께서 이 세상이 그렇게 예수가 지키시는 도피성이라면 이 세상에서 고통 받고 핍박 받는 성도의 현실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냐?’며 북한에 있는 기독교인들의 핍박 상을 메일로 보내주셨습니다. 예수가 지키시는 도피성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처참하게 살 수가 있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안이라는 도피성은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성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끊어내는 도피성입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해 도피성은 환난을 피하는 곳이 아니라 포로로 잡혀 갇혀있는 곳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북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자유를 달라고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삶은 왜 이렇게 포로 된 자의 삶과 거리가 먼가를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잘 가고 있는 것이고 우리가 마귀의 나라에 익숙해져서 예수님의 포로로서의 삶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북에 있는 분들이 불쌍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불쌍한 자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승리를 증거하고 찬양하는 자로 살아야 하는 것이지 자기 확인이나, 자아확장, 자아실현, 살아있음, 경쟁에서의 승리 등을 목적으로 하여 내 승리를 챙기는 삶을 사는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고난의 현실을 살고 있는 이들은 힘을 내십시오. 여러분이 잘 가고 계신 것입니다. 세상살이가 진절머리가 나십니까? 잘 가고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성도입니다.

환난 속에서, 곤고 속에서, 핍박 속에서, 외로움 속에서 하늘 소망으로 평강을 놓치지 않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감옥 속에서도 평강의 찬송을 불렀던 우리의 신앙의 선배가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마지막으로 로마서의 한 구절을 결론으로 읽고 마치겠습니다.

(11:36)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For the people, by the people, of the people 이 아니라 For the God, by the God, of the God 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이 평안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은혜 안에서의 평강, 잊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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