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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3(Parables of Jesus Chapter 3)

설교내용

Parables of Jesus Chapter 3

『The Parables Teaching on Prayer』

Seoul Smyrna Church

Miju LA Smyrna Church

Pastor Sung Soo Kim

 

말씀 나누겠습니다. 누가복음 11장 1절부터 13절.

Let’s read the Word in the Gospel of Luke, chapter 1, verse 1 to 13.

 

(눅11:1-13)

11:1 예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는데, 기도를 마치셨을 때에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에게 말하였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준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그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11: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말하여라. '아버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고,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십시오.
11:3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십시오. 

11:4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우리가 용서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11: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구에게 친구가 있다고 하자. 그가 밤중에 그 친구에게 찾아가서 그에게 말하기를 '여보게, 내게 빵 세 개를 꾸어 주게.

11:6 내 친구가 여행 중에 내게 왔는데, 그에게 내놓을 것이 없어서 그러네!' 할 때에,

11:7 그 사람이 안에서 대답하기를 '나를 괴롭히지 말게.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과 나는 잠자리에 누웠네. 내가 지금 일어나서, 자네의 청을 들어줄 수 없네' 하겠느냐?

11: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의 친구라는 이유로는, 그가 일어나서 청을 들어주지 않을지라도, 그가 졸라대는 것 때문에는, 일어나서 필요한 만큼 줄 것이다.

11: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그리하면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11:10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11:11 너희 가운데 아버지가 된 사람으로서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11:12 달걀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들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7)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다른 고대 사본은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하늘에서부터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아멘

 

<Lk. 11:1-13>

1One day Jesus was praying in a certain place. When he finished, one of his disciples said to him, “Lord, teach us to pray, just as John taught his disciples.”

2He said to them, “When you pray, say: “‘Father, hallowed be your name, your kingdom come.

3Give us each day our daily bread.

4Forgive us our sins, for we also forgive everyone who sins against us.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

5Then Jesus said to them, “Suppose you have a friend, and you go to him at midnight and say, ‘Friend, lend me three loaves of bread;

6a friend of mine on a journey has come to me, and I have no food to offer him.’

7And suppose the one inside answers, ‘Don’t bother me. The door is already locked, and my children and I are in bed. I can’t get up and give you anything.’

8I tell you, even though he will not get up and give you the bread because of friendship, yet because of your shameless audacity he will surely get up and give you as much as you need.

9“So I say to you: Ask and it will be given to you; seek and you will find; knock and the door will be opened to you.

10For everyone who asks receives; the one who seeks finds; and to the one who knocks, the door will be opened.

11“Which of you fathers, if your son asks for a fish, will give him a snake instead?

12Or if he asks for an egg, will give him a scorpion?

13If you then, though you are evil, know how to give good gifts to your children, how much more will your Father in heaven give the Holy Spirit to those who ask him!” Amen.

 

오늘 우리가 세 번째로 함께 공부할 비유는 흔히들 강청기도의 능력을 강조하고, 그러한 기도를 권장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는, 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입니다.

The third Parable we’re studying today is about a friend visiting at midnight, frequently used for the emphasis on the ability of the importunate prayer, concluding the recommendation of such a prayer.

 

많은 이들이 이 비유를,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강청하여 졸라대면 하나님이 귀찮아서라도 그 기도를 들어주시고야 마신다는, 그런 아전인수식의 해석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Interpreting it to our own advantage, many people tend to think that if we importune God for anything, God would answer our prayers to avoid being bothered.

 

정말 그럴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우리의 거룩한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꾸준히 반복하여 지속적으로 기도하면 그 정성에 감격하셔서 그 기도에 응답을 하시는 분일까요?

Can it be true? Do you really think God answers to us touched by our persistent and repetitive prayers regardless of whether what we want is helpful for our holy life or not?

 여러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이게 성경에 있다?

Everybody, does Heaven help those who help themselves? Would you raise your hand if you think the phrase like ‘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 or ‘Sincerity moves heaven’ is in the Bible?

 

역시, 우리 서머나 교회는 수준이 높아요.

As expected, the level of us Smyrna Church in L.A. is high, :)

 

미국 개신교 교인들의 70%가 출구조사를 했더니 그러한 말들이 성경에 있다고 대답을 했다지요? 미국도 다 허당이예요.

According to an exit poll, 70% of Protestants in America answered such a phrase would be in the Bible, didn’t they? They’re sloppy indeed.

 

여러분, 그건 성경과 완전히 대치되는 개념들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지 않습니다.

Everybody, those concepts are completely contrary to the Bible. Heaven never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

 

오히려 하늘은 하늘의 뜻대로 인간을 바꾸어냅니다. 하늘은 절대 인간들에게 다스려지거나 조종되지 않습니다. 하늘이 인간을 다스립니다.

Rather, Heaven changes humans according to its will. Heaven is never controlled or manipulated by humans. Heaven rules humans.

 

하나님은 절대 성도들이 드리는 기도의 양이나, 기도의 자세나, 끈기 등을 고려하여 기도 응답의 가부를 결정하지 않으십니다.

God never makes the right or wrong decision for answering prayers considering the amount, the attitude and the persistence of the prayer we saints offer.

 

하나님은 오히려 성도의 기도를 당신의 뜻에 맞게 바꾸어 내시는 분입니다.

Rather, God modifies the prayers of saints to suit His will.

 

그럼에도 하나님도 귀찮을 정도로 강청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보좌가 흔들려 하나님이 마침내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그런 류의 해석은 하나님을 한낱 해결사로 전락시켜 버리는 불경스러운 성경해석인 것입니다.

Therefore, such an idea that if we pray importunely to the degree of bothering God, the throne of God will be shaking and God is bound to answer our prayers is a blasphemous interpretation degrading God into a mere troubleshooter. 

 

우리네 인간 세상에서의 부모들도 자식들이 무조건 땡깡을 부린다고 그 요구를 다 들어주지 않습니다.

Even in this world, we parents don’t gratify children’s every wish unconditionally despite their badgering.

 

우리네 인간세상의 부모들도 그 자식의 요구가 과연 그 자식의 사람됨에 도움이 될 것인가 아닌가를 심사숙고 한 후에 그 자식의 요구에 대한 가부간의 응답을 합니다.

The parents in this human world respond to children’s demands after considering whether their demands are helpful for building the personality of the children or not.

 

하물며 우리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숨과 바꾸셔서 당신 나라 백성으로 양육하고 계신 그 자식들의 요구를 그저 끈질김과 간절함, 강청이라는 것만을 근거로 하여 응답의 유무를 결정하시겠습니까?

Much more, would our Father God, who exchanged His own life with us saints and brings us up as His people, decide to respond to our wish or not only based on the persistence, eagerness and importunity? 

 

기도의 응답을 너무 못 받은 어떤 사람이 나중에 하늘나라에 들어갔다고 가정해 보자구요.

Let’s suppose a man who hadn’t been answered his prayers went to heaven later.

 

그런데 자기가 기도의 응답을 그렇게 못 받은 이유를 하나님께 여쭈어 보았더니 하나님께서 ‘너는 참 끈기가 없더라, 금식 기도도 열흘을 작정해 놓고 여드레 만에 중단하고, 100일 새벽기도를 작정하고도 90일을 못 채우더라, 좀 더 끈기 있게, 끈기를 발휘해 보지 그랬어? 그럼 내가 들어주었을 텐데, 열흘만 더했으면 내가 그 기도 들어줬을꺼야’ 만약에 하나님이 이렇게 대답을 하셨다고 하면 여러분은 그런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천국에 함께 살 수 있겠습니까?

To the question why his prayers had never been answered, if God answered, ‘You’re not persistent enough. You stopped your fast only after 8 days despite resolving 10 days of fasting. Also, you couldn’t make 100 days of early morning prayers as you had promised; only doing it for 90 days. Why didn’t you do it more patiently? If you had prayed 10 more days, I would’ve answered to you’, can you live with such Father God eternally in Heaven?

 

그리고 오늘 본문 중 그 어디에 친구가 끈질기게 요구했다는 대목이 있습니까? 그냥 ‘떡 있어?’ 한번 물어본 것으로 친구의 요구는 끝이었습니다.

Moreover, in today’s text, where about is there a part the friend asked for bread importunely? With a single asking ‘lend me three loaves of bread’, the requirement of the friend ends there.

 

예수님은 떡 세 덩이를 요청 받은 그 친구가 잠자리에서 일어나 떡을 주었는지 안 주었는지도 밝히지 않으십니다. 그냥 질문을 하나 던지시고는 그 질문에 대한 제자들의 대답을 추론하셔서 기도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계실 뿐입니다.

Jesus didn’t reveal whether the friend who was asked for the three loaves of bread got out of bed and gave the bread or not. Just tossing a question, Jesus inferred His disciples’ answer and was explaining what prayer is.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유가 강청기도의 능력에 대한 비유로 둔갑을 한 것은 인본주의적 색깔을 짙게 드리우고 있는 그 ‘강청’이라는 단어 하나 때문에 그 단어로 모든 비유의 내용이 흡수가 되어버린 거예요.

Nevertheless, the reason this parable has been turned into the parable of the power of importunate prayer is because the expression‍ “shameless audacity or importunity” showing the humanistic color has soaked up all the contents of the parable.

 

그렇다면 과연 이 비유가 담고 있는 진짜 내용은 무엇일까요? 지금부터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Then, what’s the real content this parable contains? From now, let’s look into it one by one.

 

먼저 이 비유가 어떤 문맥 속에 들어 있는지를 살펴봐야 하겠지요?

First, we should study where about this parable is positioned contextually, right?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오늘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이 비유는 주기도문에 붙어있는 비유입니다. 그게 이 비유를 여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As you’ve seen, the parable we’re studying today is attached to the Lord’s Prayer. That’s the key to unlock this parable.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에 대해 가르쳐 달라는 요구를 했습니다.

The Disciples asked Jesus to teach them about prayer.

 

그건 단순히 기도의 방법이나 내용을 가르쳐 달라는 그런 요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은 기도를 거의 습관처럼 자주 하고 있었고, 기도를 무척 중요한 종교행위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It’s not about teaching them a simple ways of praying or the content of prayer because the Jewish at that time often prayed just like a habit, regarding prayer as a very important religious activity.

 

그래서 그들은 기도문 몇 개씩은 늘 암송하고 다녔고, 시편의 기도들을 노래로 만들어 흥얼거리며 다닐 정도로 기도에 열심이었던 사람들입니다.

So, they recited several prayers all the time and were the devotees who sang the prayers in the Psalms as songs.

 

예수님 당시 유대에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을 유명한 기도문들이 여러 개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기도문들을 수시로 암송했습니다.

At the era of Jesus, there were several famous prayers the Jewish must have known well. They frequently recited them.

 

그 가운데는 ‘카디쉬’라는 좀 짧은 형태의 기도문도 있었고, 18번 축복기도라 불리는 ‘세모네 에스레’ 라는 기도문도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카디쉬와 세모네 에스레같은 기도문들을 의무적으로 매일 두 세 번씩 낭송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렇게 기도를 많이 알고 있었고 많이 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Among them, there were ‘Kaddish (קדיש)’, a short form of prayer, and ‘Shemoneh Esreh (שמנה עשרה)’, which is also called ‘the 18th blessing prayer’. The Jews had to recite prayers such as Kaddish two or three times a day. The Disciples were well-acquainted with many prayers, reciting them quite often.

 

그렇다면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구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인가?

Then, what does the Disciples' request of teaching them prayer mean?

 

당시 커다란 무리를 이루고 있던 종교적, 정치적 이익 집단들은 각각 자신들의 믿는 바와 지향하는 바를 특화시켜서 기도문으로 요약하여, 마치 신앙고백서나 사명선언문처럼 암송하거나 읽고는 했습니다.

At the time, huge religious or political groups had their own abridged prayer specialized by their own belief and aim and they recited or read them as the confession of faith or the mission manifesto.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세네파, 세례요한파, 헤롯당 등등 모든 집단들이 각각의 특색을 살린 기도문을 갖고 있었습니다.

The groups such as the Pharisees, the Sadducees, the Essenes, the group of John the Baptist, the party of Herod, etc, had their own prayers making the best of their traits.

 

지금 예수님을 좇는 제자들은 그러한 배경 하에서 ‘주여, 우리에게도,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준 것처럼, 요한파도 기도가 있는데 왜 우리에게는 기도문이 없어요? 기도문을 하나 만들어 주세요.’라고 부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In the background, the Disciples were asking Jesus to give them their own prayer, ‘Lord, even John the Baptist gave his disciples their own prayer, then why don’t we have one? Give us our own prayer’.

 

우리도 우리 파만의 특화된 기도문을 하나 갖자는 것이었습니다.

What they were saying is that they wanted to have their own prayers specialized only for their group.

 

주님은 그들의 요구를 금방 간파하시고, 그 자리에서 예수를 좇는 자들이 드려야 하는 기도의 핵심을 몇 가지로 나누어서 하나의 기도문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Seeing through their request, the LORD Jesus made a prayer for them on the spot by dividing the heart of the prayer into several categories, which is offered by the followers of Jesus Christ.

 

그게 우리가 알고 있고 늘 암송하고 있는 주기도문입니다. 여러분이 이미 공부하셨다시피 이 주기도문은 우리 자신의 소원을 이루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것 정도를 그 내용으로 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우리성도의 정체성을 규정하며, 우리 성도가 도달하게 될 궁극의 목적지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That is the Lord’s Prayer we know and recite all the time. As you’ve studied, this Lord’s Prayer isn’t about the degree of making our wish come true or solving problems. The Lord’s Prayer taught by Jesus defines the identity of us saints and introduces the final destination we saints will reach.

 

‘나의 품속에 가지고 있는 나의 가장 깊은 소원이 내가 누구인가를 정의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There’s a saying ‘the deepest wish in my heart defines who I am.’

 

내가 갖고 있는 내 마음속의 가장 깊은 소원이 바로 내가 누구인가를 정의한다는 말이예요.

It means we’re defined by the deepest wish held in our heart.

 

그게 기도로 나오겠죠. 따라서 우리가 어떤 기도를 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어떤 인간인지가 폭로되는 거예요.

That wish will naturally come out as a prayer. Accordingly, depending on what to pray, what we are is revealed.

 

그런 의미에서 이 주기도문을 한번 보세요. 하나님은 지금 기도문을 달라는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이렇게 살게 될 것이고, 너희들의 정체성은 바로 이거야를 가르쳐주시는 거예요.

In that sense, take a look at the Lord’s Prayer again. The LORD Jesus teaches the Disciples asking for their own prayer that they’ll live in this way and their identity is this.

 

주기도문을 제가 사역(私繹)으로 조금 구체적으로 늘여서 번역을 하면 이러합니다.

My personal interpretation of the Lord’s Prayer, specified and increased a bit, goes like this;

 

유진 피터슨이 요즘 메시지라는 성경 해설집을 냈죠?

Eugene Peterson published an explanation book of the Bible called ‘Message’, right?

 

본인은 성경이라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아요. 어설픈 부분이 많이 있기 때문에.

Although he claims it the Bible, I don’t want to think that way, for it has many clumsy parts in it.

 

제가 그러한 모양으로 한번 주기도문을 번역해 볼께요.

I’ll try interpreting the Lord’s Prayer in his style.

 

우리 성도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들이며 (이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예요),

‘We saints are the people who can call God in Heaven our Father (Our Father in Heaven),

 

우리 때문에 모독을 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은 반드시 거룩하게 찬양을 받게 될 것이며,

God’s name insulted because of us will surely be praised holy,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일어나는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될 것이고,

The Kingdom of God where God’s reign occurs perfectly will be completed,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서 온전히 성취가 될 것이며,

God’s will that has already achieved in Heaven will be achieved wholly in this world,

 

우리에게 하늘의 만나이신 예수님을 양식으로 주셔서 죄와 허물로 죽어있던 우리를 살려내신 하나님께서, 다른 세상의 양식들을 모두 쳐 내시고, 오직 예수라는 양식으로만 배부른 자들로 만들어 내실 것이고,

God, who has saved us dead with sin and faults by giving Jesus the Manna in Heaven as our bread, will remove all the other worldly bread, making us into the ones who can be full with Jesus the bread,

 

율법에 의해 형벌을 가해야 하는 율법의 시대가 가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한 은혜의 시대가 와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율법으로 정죄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으며,

As the era of the law where we had to impose punishment by the law has gone while the era of grace has come through the Cross of Jesus, the Kingdom of God has already come where we are allowed not to punish the sinners who sin against us by the law,

 

 가시적으로도 완성이 될 것이고, 선악과라는 시험, 즉, probation기간이 완전히 끝나고 생명나무만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이 곧 도래할 것이고,

The kingdom will be completed visibly, and the test of the fruit of 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of evil, that is, the period of probation is completed and the new sky and the new earth will arrive soon where only the tree of life exists,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모두 아버지께만 돌려지는 그러한 완벽한 하나님 나라가 올 것이며,

The perfect Kingdom of God will come where the kingdom, the power and the glory is dedicated solely to Father God,

그 나라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 자들이 바로 우리 성도인데, 그 모든 것이 하늘의 양식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영적으로 모두 이루어질 것이고 이루어졌습니다.’

We saints are the ones who’ll live with God there forever, and all of those things have been done and will be done spiritually by the Cross of Jesus Christ who came to us as the heavenly bread.’

 

이게 주기도문이 담고 있는 우리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This is our confession of faith the Lord’s Prayer holds.

 

그런데 주기도문 안에 쓰인 동사가 전부 부정과거 시제라 그랬죠. 그런데 이 부정과거가 imperative, 명령형으로 쓰이면 어떤 의미가 있다고 했어요?

By the way, all of the verbs in the Lord’s Prayer take the aoristic tense, right? What meaning does it have when the aoristic tense is used in the imperative mood?

 

과거의 의미와 현재, 미래의 의미와 전체를 아우르는 그런 내용으로 바뀐다고 했습니다.

I explained it changes into the meaning to embrace the past, the present and the future as a whole.

 

그래서 예를 들어 우리가 ‘나라이 임하옵시며’ 라고 기도할 때, 그 안에는,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했으며, 임하고 있으며,완전하게 임할 것이란 뜻이 모두 담겨 있는 것입니다.

So, for example, when we pray ‘Your kingdom come’, it has all of the meaning that the Kingdom has come, is coming and will come perfectly.

 

그런데 주기도문의 모든 동사가 부정과거 명령형입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은 과거에 이미 임한 것과 현재에 진행 중인 것과 종말의 현실이 모두 그려져 있는 ‘이미’와 ‘아직’의 교리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기독교 핵심교리의 보고인 것입니다.

All of the verbs in the Lord’s Prayer take the aoristic imperative tense. It means the Lord’s Prayer clearly shows the doctrine of ‘already’ and ‘not yet’, which depicts the Kingdom already came in the past, is ongoing now and the reality of the eschaton all together, which is the core doctrine of Christianity. 

 

아니, 아직 십자가도 지기 전에 이런 기도문을 가르쳐줘도 되는 거예요?

What? Is it OK to teach this prayer before bearing the Cross?

 

예. 부정과거시제 동사가 쓰여 있다니깐요.

Of course, yes, since it is written in the aoristic imperative tense.

 

그런데 주기도문의 청원을 구체적으로 나누어보면 크게 일곱 개로 나누어집니다.

The petitions in the Lord’s Prayer can be concretely divided into 7 major parts.

 

1)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A)

2) 나라이 임하옵시며(B)

3)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C)

4)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D)

5)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C')

6)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B')

7)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입니다.(A')

1) ‘Hollowed be Your name’ (A)

2) ‘Your kingdom come’, (B)

3)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C)

4) ‘Give us today our daily bread’ (D)

5)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C’)

6)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

7) ‘but deliver us from the evil one’ (A’)

 

저는 이 주기도문의 구조를 카이즘 구조로 봅니다. 1항과 7항을 A와 A'로 보고, 2항과 6항을 B와 B'로 봅니다. 그리고 3항과 5항을 C와 C'로 봅니다. 그리고 가운데 4항을 이 기도문의 핵심인 D로 봅니다.

I view the structure of the Lord’s Prayer as Chaism. I see the first and the 7th articles are A&A’, the second and the sixth are B&B’, and the third and the fifth are C&C’. Also, the fourth article in the middle is D, which is the core part of the Lord’s Prayer.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악에서 구하옵소서) 세상의 악이 완전히 제거가 되어야 합니다.

To God’s name be hollowed, the sin of the world must be eradicated (deliver us from the evil one).

 

그렇게 A와 A'가 연결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완성이 되기 위해서는 선악과의 시험기간, 하나님의 probation기간이 끝나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B와 B'가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옵시며와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가 연결이 되는 거예요.

 A and A’ are connected like that. Also, to make the Kingdom come and be completed, the trial period of the fruit of the tree of knowledge of the good and the evil, that is, the probation period given by God must be over, so B and B’ are connected. That is, ‘Your kingdom come (B)’ and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 are connected.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땅에서도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뜻은, 바로 하나님의 십자가에 의한 죄 사함, 즉 은혜의 나라의 완성에 관한 것이므로 C와 C'를 연결하는 것입니다.

Moreover, as God’s will which has been done in Heaven and are being done on earth now is about the forgiveness by the Cross of God, that is, the completion of the Kingdom of grace, C and C’ are connected.

 

그렇게 카이즘 구조로 밀고 들어 가다보면 가운데 하나가 남지요? 그게 카이즘 구조의 핵심입니다. 그게 뭡니까?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입니다. 그러니까 카이즘 구조의 나머지 내용들은 바로 이 D, 양식이라는 핵으로 모두 수렴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When we apply Chaism to the Lord’s Prayer, the one in the middle is left, isn’t it? That’s the core of Chaism structure. What’s left? ‘Give us our daily bread’ is left. It means the rest contents of the Chaism here are converged to D, ‘the daily bread’, the core part of the Prayer.

 

그럼 주기도문의 모든 기도가 겨우 우리가 이 땅에서 먹고 살 양식에 관한 기도였단 말인가? 그게 핵심이라면…

Then, does it mean all the prayers in the Lord’s Prayer would be simply about our daily bread for living on earth if it were the core?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성경 자체에 모순이 일어납니다.

No, it isn’t. If so, there’ll be a contradiction in the Bible.

 

이 주기도문이 기록이 되어 있는 마태복음으로 가면 ‘오늘 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어구 바로 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6장 25절 볼까요?

In the Gospel of Matthew, where the Lord’s Prayer is written, right after the word “give us our daily bread today”, there comes this verse. Shall we read Matthew, chapter 6, verse 25?

 

(마6:25)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 하냐

<Matt. 6:25>

25“Therefore I tell you, do not worry about your life, what you will eat or drink; or about your body, what you will wear. Is not life more than food, and the body more than clothes?

 

바로 위에서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고, 바로 밑에서는 구하지 말래요. 어떤 걸 쫓아가야 되요?

Right before the verse, the Bible says we should ask for the daily bread, but right after the word, it says we shouldn’t. Which one should we follow then?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We can learn a very important fact here.

 

지금 주님이 주기도문에서 제자들을 비롯한 성도들에게 구하라고 하는 일용할 양식은 단순히 이 땅에서 먹고 살 양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In the Lord’s Prayer, the daily bread Jesus told the Disciples and saints doesn’t simply indicate the food we eat to live on earth.

 

여러분의 성경을 잘 보시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의 ‘일용할 양식’이라는 단어 옆에 풋 노트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혹 내일의 양식’이라는 말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

Reading the Bible carefully, we will see a footnote written next to the word “daily bread” in the prayer “Give us today our daily food”. And, we can find the word “or tomorrow bread” there.

 

그 이유는 ‘일용할’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에피우지온’이라는 단어에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에피우지온’이라는 단어는 헬라의 어떤 문헌에도 쓰인 바가 없는 아주 생소한 단어입니다. 성경에서도 딱 여기서 한번 쓰였습니다.

The reason is that the ancient Greek word “epiousion (πιούσιον)”, meaning “daily”, has several meanings in it. However, the word “epiousion” is a very unfamiliar word that hadn’t been used in any ancient Greek literature. The word is used only once in this verse even in the Bible.

 

따라서 그 헬라어 ‘에피우지온’이라는 단어가 현재에 어떠한 의미로 쓰이고 있는가를 가지고 고대 당시의 문헌을 해석을 한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언어의 의미는 수시로 변하니까요.

Accordingly, it’s very dangerous to judge the meaning of the ancient Greek word “epiousion” with the modern application since the meaning of a word changes with the times.

 

제가 토플 시험을 볼 때만 해도 ‘gay’라는 단어는 ‘joy’라는 의미로 쓰였던 단어입니다. 그래서 비슷한 말을 고를 때 그걸 골라야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gay라는 단어는 동성연애자를 가리키는 단어가 되었지요?

For example, when I took TOEFL test, the meaning of the word ‘gay’ was similar to that of ‘joy’, so I had to choose it for the synonym. However, the word ‘gay’ usually indicates a homo sexual man these days, right?

 

언어는 이렇게 짧은 시간에도 완전히 그 뜻이 바뀌어 버린단 말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현대 헬라어를 가지고 그 당시의 헬라어를 추론해서 해석을 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As you see, the meaning of a word can be changed completely in a short time. That’s the reason we mustn’t infer and interpret the meaning of ancient Greek words with modern Greek.

 

그렇다면 다른 그 어떤 문헌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그 ‘에피우지온’이라는 단어의 뜻을 어떻게 올바로 해석을 할 수 있습니까? 그때 필요한 것이 아람어 성경입니다.

Then, how can we interpret the meaning of the word ‘epiousion’ correctly which can’t be found in any other literature? What we need for this situation is the Aramaic Bible.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아람어를 쓰셨습니다. 아람어는 바벨론의 언어인데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70년간 있으면서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가 아람어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예수님도 아람어를 쓰셨어요.

During the public life, Jesus spoke in Aramaic language because Aramaic, the language of Babylonia, was the common language in Jewish society at that time as the result of Babylonian Captivity for 70 years.

 

오히려 히브리어는 유대인들 중 아주 극소수의 학자들이나 랍비들 정도나 쓸 수 있는,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잊혀 진 언어였습니다. 그래서 아람어 성경은 당시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잘 그려주는 그러한 좋은 참고가 됩니다. 그래서 헬라어 성경의 단어해석이 모호할 경우, 항상 아람어 성경과 비교 대조하여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Rather, Hebrew language was nearly forgotten to the ordinary Jewish people, only used by a small minority of Jewish scholars or Rabbis. The Aramaic Bible is a good reference that shows the sociocultural background at that time. So, when an interpretation of a word in the Greek Bible is ambiguous, it’s important to compare and contrast it with the Aramaic Bible all the time.

 

그런데 아람어 주기도문에는 ‘오늘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그 부분을 번역을 하면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오늘 먹을 양식을 주세요.’가 아닌,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을 주세요.’라고 번역을 해야 맞아요. 그런 청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자체 모순을 일으키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쵸?

In the Aramaic Lord’s Prayer, it’s written ‘give us daily bread for tomorrow’. Therefore, the correct translation of the petition shouldn’t be ‘God, give us today our daily food’ but ‘God, give us our daily food for tomorrow’. Then, the Bible doesn’t need to make a contradiction in itself, right?

 

그렇다면 내일의 양식, 내일의 떡이 무엇인가?

Then, what is the daily food, the daily bread for tomorrow?

 

구약에 바로 그 내일의 양식이 나옵니다.

The Old Testament reveals what it is.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일의 양식을 오늘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사건이지요? 하나님은 6일 째 되는 날에 항상 내일의 양식을 함께 주셨습니다.

There was an occasion God gave the Israelites the bread for tomorrow on the day. The incident of giving manna in the wilderness, isn’t it? On the sixth day, God gave the Israelites manna twice as much for the next day.

 

왜 여섯째 날에 다음날 것까지 주셨습니까? 제가 주기도문 강해 때 그것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드렸으니까 잘 모르시는 분 들은 그 부분을 참고해 주세요.

Why did God give the food for tomorrow on the sixth day? Since I explained the reason in detail in the expository for the Lord’s Prayer, if you don’t know it well, please refer to it.

 

그 다음날이 안식일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는 그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기 때문에, 여섯째 날에 일곱째 날 것까지 거두고, 안식일에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해 놓으신 온전한 창조를 기념하며 즐기고, 종말에 이루어질 참 안식을 고대하라는 의미에서, 여섯 째날 다음날 것까지 주신 것입니다.

It’s because the next day was the Sabbath day. Since the Sabbath day had to be observed holy, God gave them manna for the next day on the sixth day to let them celebrate and enjoy the perfect Creation He did in the beginning. Also, in the sense of looking forward to the real Sabbath that would be achieved at the eschaton, God gave them manna for the next day on the sixty day.

 

그렇게 여섯째 날 내일의 양식까지 주심으로 안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하시고, 아울러 그 안식의 날은 반드시 온다는 것을 주지시킨 것입니다.

By giving the food for the next day on the sixth day, God made them learn what the Sabbath is, while convincing them that the Sabbath day surely would come.

 

왜? 내일의 양식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늘 주어졌다는 것은 우리에게 내일이 오겠구나 하는 것을 하나님이 약속하신 거거든요. 내일이 안 오는데 내일의 양식을 줄 리가 없잖아요. 근데 그 내일이 안식일이란 말입니다.

Why? The thing that our daily bread for tomorrow was given by God means God promised the tomorrow will come to us. If there’s no tomorrow, why would God give us the food for tomorrow? The next day, ‘tomorrow’, is the Sabbath day.

 

그러니깐 그 안식일이 담고 있는 그 나라는 반드시 오겠구나를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내일의 양식이예요. 여섯째 날 받았던 내일의 양식.  마찬가지예요. 성도는 이 땅에서 여섯째 날을 살면서 완성의 날인 일곱째 날을 살 수 있습니다. 어떻게? ‘내일의 양식’으로.

In other words, the food for tomorrow explains the fact that the Kingdom the Sabbath holds will surely come. The daily bread for tomorrow given on the sixth day. It’s the same. We saints can live the seventh day, the day of perfection, while living the sixth day on earth. How? With ‘the daily food for tomorrow’.

 

예수님이 쓰셨던 아람어 주기도문을 보면 거기 ‘마헬’이라는 아람어 단어가 나오는데 그 단어가 ‘내일의’라는 뜻입니다.

In Aramaic Lord’s Prayer Jesus used, there appears an Aramaic word “mahar”, meaning “tomorrow”.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람어의 ‘마헬’이라는 단어는 그냥 24시간 후의 내일이라는 뜻이 아니라 오늘과는 다른, 다가올 시대의 내일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The important thing about the Aramaic word ‘mahar’, however, is that it doesn’t mean tomorrow which is technically 24 hours after today, but means the different day from today, that is, the following day of the era to come.

 

그런데 다가올 시대의 어떤 날. 근데 다가올 시대가 한 단어로 뭐라고 했어요? 다가올 시대의 삶. 영생이라 그랬잖아요.그러니까 내일의 양식은 다가올 시대의 삶을 위한 양식, 영생을 위한 양식, 어디서 본적 있죠? 요한복음에서 봣잖아요.누구였어요 그게? 예수 그리스도 였잖습니까. 요한복음 6장 27절 보세요.

A certain day of the era to come. What is that in one word? The life of the era to come, the eternal life, I explained. That is, the daily food for tomorrow is the food for the life of the era to come, the food for eternal life, haven’t you seen it before? We’ve seen it from the Gospel of John. Who was the bread for tomorrow? It’s Jesus Christ. Let’s read the Gospel of John, chapter 6, verse 27.

 

 (요6:27,48~51)

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다가올 시대에 필요한 양식이라는 뜻이죠.)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 자니라

48 내가 곧 생명의 떡 이로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 이니라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 이로라 하시니라

<Jn. 6:27, 48-51>

27Do not work for food that spoils, but for food that endures to eternal life, which the Son of Man will give you. For on him God the Father has placed his seal of approval.”

48I am the bread of life.

49Your ancestors ate the manna in the wilderness, yet they died.

50But here is the bread that comes down from heaven, which anyone may eat and not die.

51I am the living bread that came down from heaven. Whoever eats this bread will live forever. This bread is my flesh, which I will give for the life of the world.”

 

여기에서 떡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와 ‘일용할 양식’에서 ‘양식’으로 번역이 된 단어가 똑 같은 단어예요. ‘알토스’. 하늘의 떡으로 오신 예수와 일용할 양식의 양식은 ‘알토스’ 똑같은 단어, 떡입니다.

In here, the words translated into ‘bread’ and ‘food’ in daily food came from the same word; ‘artos (ρτος)’. The exact same word ‘artos’ is used to describe Jesus who came as the heavenly bread and the food in the phrase ‘daily food’.

 

그러니까 주기도문 안에서 우리에게 오늘 일용할 양식, 내일의 양식, 내일의 떡을 주세요 에서 그 떡은 누구?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Then, who’s the bread in the phrase ‘give us today the daily bread, the food for tomorrow and the bread for tomorrow’? It exactly refers to Jesus Christ.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통하여 ‘일용할 양식, 일용할 떡’을 구하라고 하신 것은 바로 내일의 양식, 다가올 세대의 약식, 영생하는 양식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라는 뜻으로 주기도문을 주신 것입니다.

Therefore, the true meaning of the phrase ‘daily food, daily bread’ in the Lord’s Prayer actually is that we should seek Jesus Christ who has come as the daily bread for tomorrow, the food for the generation to come and the food for eternal life, and this is the reason Jesus gave us the Lord’s Prayer.

 

그 예수에 의해 죄가 사해지고, 그 예수에 의해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며, 그 예수에 의해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고, 그 예수에 의해 하나님의 공의가 채워져 율법의 시대가 가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율법의 형벌로 정죄하거나 심판하지 않고 용서할 수 있는 은혜의 시대가 온 것이며, 그 예수에 의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회복이 된 것입니다.

Sins are forgiven by the very Jesus, the Kingdom is perfected by the very Jesus, God’s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by the very Jesus, God’s righteousness will be filled and the era of the law goes away by the very Jesus, and the time of grace has come when we can forgive the sinners who sinned against us without punishing or judging by the law by the very Jesus, and the holiness of God’s name is restored by the very Jesus.

 

그래서 주기도문의 카이즘 구조 가장 가운데에 ‘내일의 양식, 내일의 떡’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의 핵심은 내일의 양식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That’s the reason the phrase ‘the daily food or bread for tomorrow’ takes up the middle of the Chaism structure of the Lord’s Prayer. In other words, the core of the Lord’s Prayer is Jesus Christ, the food for tomorrow.

 

바로 그 양식, 떡에 관한 구체적 설명이 바로 떡을 구하는 친구의 비유에 메시지로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비유가 주기도문과 붙어 있는 것입니다. 

The detailed explanation of the very food, the bread is contained as a message in the parable of the friend who’s seeking for the bread. That’s why this parable is connected to the Lord’s Prayer.

 

당시 유대인들은 더운 날씨를 피해 밤에 주로 여행을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여행길에 식당이나 여관이 많지 않았던 시대이기 때문에, 거의 늦은 밤에 목적지에 도달하여 숙식을 해결하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그렇게 밤을 타고 찾아온 친구가 떡을 좀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집에는 떡이 없었습니다.
At the time of Jesus, the Jews used to travel at night to avoid hot weather in the daytime. Since diners or inns on a journey weren’t many at that time, it was usual to take care of room and board after reaching the destination late at night. As usual, the friend who arrived at night asked some bread, but the house didn’
t have any bread left.

K. E. Bailey라는 신학자는 복음서를 복음서의 배경인 중동에서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 중동에 가서 30년 이상을 계속 살면서 복음서를 해석했던 사람입니다. 참 극성이죠, 그죠
?
K.E. Bailey, a theologian, lived in the Middle East for more than 30 years to understand the background of the Gospels and interpret them correctly. How overeager, isn’
t he? 

저도 신학교 때 그의 책을 보면서 당시 유대 지방의 관습에 대해 참 많이 배웠는데요, Bailey 박사에 의하면 당시 중동지방의 사회는 철저한 공동체 사회였다고 합니다
.
Studying his books in the seminary, I learned a lot about the customs of Judea at that time, and according to Dr. Bailey, the Middle East at that time was a thorough community society. 

그래서 떡도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만들었어요. 지금 우리가 각 구역이 돌아가면서 전체가 먹을 음식을 만들잖아요? 그렇게 한 집이 돌아가면서 마을 전체가 먹을 떡을 만들었단 말입니다
.
So, the villagers of the town took turns to bake bread. It’
s like the cell-groups in our church take turns to prepare food for everyone, right? Just like that, taking turns, a household baked bread for the whole town. 

그리고 어느 한 집의 손님은 그 집만의 손님이 아니라 마을 전체의 손님 대접을 받았다고 합니다

And a family visitor was treated as the visitor of the whole town. 

그러한 사회문화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성경에 나오는 대표의 원리나 연합의 원리가 그리 생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그 대표의 원리로 살고 있었거든요
.
With such a sociocultural background, the principle of representative or the principle of union in the Bible wasn’
t that strange to them since they had already lived in the principle of representative. 

그리고 그들의 친구 개념은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친구의 개념과 많이 달랐다고 합니다. 그들은 부모나 자식 등의 관계가 아주 친밀하게 무르익었을 때의 그 관계를 친구 관계로 묘사를 했을 만큼, 당시 중동지방의 친구관계라는 것은 네 것 내 것이 없는 아주 친밀한 관계였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맺고 있는 모든 관계 중 가장 으뜸으로 무르익은 관계가 친구예요
.
Also, their concept of friends was quite different from that of ours now. They described the parent-child relationship as friends when the relationships were ripen enough, so the relationship with friends in the Middle East at that time were extremely close without the distinction of what’s mine and what’
s yours. That is, the most ripen relationship among human relationships was the relationship of friends.

따라서 밤에 친구 집에 도착한 그 친구도 미안해 할 것이 전혀 없는 상태였고, 그 친구를 맞아 다른 친구 집으로 떡을 빌리러 갔던 친구도 전혀 미안할 것 없이 떡을 요구할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Accordingly, the friend who arrived at midnight didn’t need to be sorry for it, and the host who received his friend had no problem to ask for some bread from another friend’
s in the town. 

왜냐하면 당시의 풍습 하에서 그 손님은 마을 전체의 손님이었고, 그날 떡을 만든 집이 바로 잠자고 있던 친구의 집이었으며, 친구 사이는 밤낮 구별 없이 아무 때나 그 집의 것을 제 것처럼 쓸 수 있는 사이였기 때문입니다
.
It’s because, under the custom at that time, the visitor was regarded as the town’s visitor, the bread house of that night was the friend’
s in bed, and the relationship of friends was allowed to use whatever and whenever they needed. 

예수님은 그러한 상황을 설정해 놓으시고 질문을 하나 던지십니다
.
누가복음 11장 6절 보세요. 본문 6절
.
Setting such a situation, Jesus tossed a question.
Let’
s read the Gospel of Luke, chapter 11, verse 6.

(눅
11:6-7)
6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Lk. 11:6-7>
6a friend of mine on a journey has come to me, and I have no food to offer him.
 
7And suppose the one inside answers, ‘Don’t bother me. The door is already locked, and my children and I are in bed. I can’t get up and give you anything.’


이 질문은 제자들에게 실소를 자아케 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아니오’라는 대답은 상상할 수도 없는 대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연한 질문을 예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유는 끝이 납니다 그냥. 이렇게 이 비유에 떡을 구하는 친구의 강청이나 끈질김이나 땡깡은 단 한 줄도 기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냥 그 질문으로 비유의 내러티브는 끝이 나고 설명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본문 8절로 갑니다.
The question Jesus tossed must have made the Disciples laugh since ‘No’ would be an unimaginable answer to the Jews. Nevertheless, Jesus asked a very obvious question and then the parable ended there. As you see, in this parable, there is no single line written about the friend’s importunity, persistence or acting up for the bread. With the mere question, the narrative of the parable ends and the explanation is followed. Let’
s go to verse 8.

(눅
11:8)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Lk. 11:8>
8I tell you, even though he will not get up and give you the bread because of friendship, yet because of your shameless audacity he will surely get up and give you as much as you need.

여기에 딱 한번 나오는 강청이라는 단어 때문에 이 비유가 크게 오해되고 있는 것입니다.
Due to the word ‘audacity or importunity’
 appearing only once here, this parable has been misunderstood a lot.

여기에 쓰인 강청이라는 ‘아나데이아’라는 단어는 사실 교부시대를 거쳐 중세 시대에 들어와서야 강청함, 끈질김 등의 단어로 쓰였지 그 전에는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이던 단어였습니다
.
The word ‘anaideia (
ναίδεια)’, meaning ‘importunity’, actually began to have the meaning ‘importunity’ only from the Middle Age after going through the Patristic period. It had a totally different meaning before then.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책 ‘Jewish War’나 유대 랍비들의 문헌, 그리고 70인역 등을 보면 당시에 ‘아나데이아’라는 단어는 모두 ‘수치를 피하기 위함,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함, 체면을 잃지 않기 위함’등의 의미로 쓰였던 단어입니다
.
According to ‘Jewish War’, written by Josephus, a Jewish historian, literatures of Jewish Rabbis or Septuaginta, the word ‘anaideia’ was used to mean ‘to avoid being humiliated, shameful or not to lose face, etc.’
 

그러다가 라틴어 성경 번역본에서 처음으로 ‘importunity’(강청함)이라는 뜻으로 번역이 되었고, 곱틱 번역본에서 ‘persistence’(끈질김) 등으로 번역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단어들과 상황들을 우리의 문화권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서 그 비유를 우리의 문화나 언어로 옷을 입혀 현대화 시켜 버리면 안 됩니다
.
After then, in the Latin Bible, ‘anaideia’ was translated into ‘importunity’ for the first time, and it was translated into‘persistence’
 in the Coptic Bible. After all, we should not modernize certain words or circumstances with our own culture or language when we bring them into our cultural area.

지금까지 설명을 해 드린 단어의 배경이나 사회문화적 배경 등을 정보로 하여 이 비유를 다시 해석해 보자고요
.
Based on the information about the word or sociocultural background, let’
s interpret this parable again.

한 친구가 밤을 타고 다른 친구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
One night, a friend visited his friend’
s house.

그 친구는 당시 집단적이며 공동체적인 사회문화 속에서 당연히 그 마을 전체의 손님입니다
.
In the collective and communal sociocultural background, he was naturally treated as the visitor of the whole village.

그래서 방문을 받은 친구는 스스럼없이 그날 마을의 떡을 구웠던 친구의 집으로 떡을 가지러 갔습니다

So, the friend who received the visitor went for the bread to his village friend who had baked it for the town that day without constraint. 

만일 그날 떡을 구운 친구가 귀찮아서 떡을 내어 놓지 않는다면 그 친구는 물론이요, 마을 전체가 수치와 창피를 당하게 됩니다
.
If the friend in charge of the bread that day had been too lazy to give his friend the bread, not only the friend who asked for the bread but also the whole town would’
ve been humiliated and put to shame. 

유대인들이 그러한 예를 치명적으로 지켜왔단 말입니다. 그래서 마을 누구에게 가서 부탁을 했더라도 그는 마을 전체의 손님으로 대접을 받아야 했었고, 그 마을 어디에 떡이 있더라도 그건 그에게 갖다 줘도 아무런 불평을 누구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태였단 말입니다
.
The Jews had been observed such manners thoroughly. So, whoever were asked a favor of in the village, they had to treat the visitor as the visitor of the town, and wherever the bread was, it should be served for the visitor and nobody could complain about it. That was the social mood at that time.

당시 유대인에게 있어서 자신의 수치와 마을의 수치는 친구 사이라는 관계를 넘어서는, 모든 행위의 근거와 이유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차라리 목숨을 내놓을 망정 수치는 당하면 안 된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마음이었습니다
.
To the Jews at that time, the humiliation of a man and his town was the ground and reason for all behaviors beyond the relationship of friends. They thought they would rather give up their life than be humiliated.

그래서 그들이 그런 수치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뒤에서 적들이 칼을 들고 쫒아 오는데 안식일에 안 뛴거예요. 신앙이라기보다는 그건 자기가치 향상에서 나온 수치를 면하기 위한, 창피를 당하지 않기 위한 그런 사고에서 나온 것입니다
.
That’s the reason they didn’
t run on the Sabbath day although their enemies were chasing them wielding swords. It was more from the development of self-value to avoid humiliation and shame than from faith. 

마치 유다가 ‘내 죄는 내가 책임진다. 쪽 팔리게 가서 용서 안 구할꺼야’ 하고 수치를 면하기 위해 자살한 것처럼, 그게 유대인들의 사고였습니다
.
Just like Judas Iscariot committed suicide to avoid humiliation, thinking ‘I’ll take full responsibility for my sin. I won’t lose my face to ask forgiveness’
, this kind of thought was common to the Jews.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그렇게 소중하고 당연한 친구사이라 해도 귀찮아서 떡을 안 내어놓을 수는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지만…혹…그렇게 친한 친구 사이라도 그 떡을 안 내놓을 수는 있을꺼야. 그러나 수치를 당치않기 위해서는(강청, 아나데이아) 절대로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건 너희들도 아는 것 아니냐?’ 이렇게 물어보시는 거예요
.
That’s the reason Jesus asked them. ‘I’ll be dammed if it is true, but there could be a case the man in charge of the bread refused to give his friend bread out of annoyingness though they are bosom friends. Such a thing would never happen, but it would be possible however friendly they are. However, not to be humiliated (importunity, anaideia), this thing can’t happen and you know it, don’t you?’
 

그러니까 세 친구와 떡 세 덩이의 비유는 절대로 거부당할 수 없는, 어떤 당연한 요청에 대한 하나의 그림으로 제시가 된 것입니다
.
In other words, the parable of three friends and the three loaves of bread is suggested as a picture showing a reasonable request, which can’
t be refused. 

그 떡이라는 예수가 성도의 기도로 안 주어질수가 없다는 얘기예요. ‘지성이면 감천이고, 조르면 주게 되어있다’라는 그런 유치한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 비유에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어떤 요구가 붙어 있는지 보세요. 본문 9절
.
It means Jesus the bread can’t help being given through the prayer of saints. It’s not about the childish story of‘Sincerity moves heaven and pestering guarantees earning.’ Now, look at the requirement of Jesus toward the Disciple in the parable. Look at verse 9.

 

(눅11:9-12)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9And I say to you, Ask, and it shall be given you; seek, and you shall find; knock, and it shall be opened to you.

10For every one that asks receives; and he that seeks finds; and to him that knocks it shall be opened.

11If a son shall ask bread of any of you that is a father, will he give him a stone? or if he ask a fish, will he for a fish give him a serpent?

12Or if he shall ask an egg, will he offer him a scorpion?

 

세 친구의 비유 아래에 그 유명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권고가 붙어 있습니다.

Right below the parable of the three friends there comes the famous advice; ‘ask, seek, knock’

 

그러니까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찾고, 두드려서 무엇을 얻어내라는 말입니까? 떡이요. 그 ‘떡은 뭐라 그랬어요? 바로 위에?

So, what should we ask, what should we seek and what should we earn through knocking? The bread! What is the bread, right before?

 

그 떡은, 알토스’는 누구다? 예수 그리스도. 그런데 주기도문에 의하면 그 떡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어요? 맞습니까?부정과거 시제로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 했잖아요? 

The bread is ‘artos’, and who is it? Jesus Christ.

Then, according to the Lord’s Prayer, the bread has already been given to us, right? In the aoristic tense, it’s said it has already been given to us, isn’t it?

 

그렇다면 우리 성도가 하늘의 양식인 예수를 열심히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얻어내야 한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Then, what does it mean we saints have to earn Jesus the heavenly bread through asking, seeking and knocking hard?

 

예수라는 하늘의 만나를 먹은 자로서 하나님 백성다운 삶, 예수 같은 삶, 자기부인과 십자가의 삶을 추구하라는 말입니다. 그 일을 해주러 오신 보혜사, 누구? 성령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결론이 이렇게 나는 거예요. 13절.

It means as the ones who have eaten heavenly manna, Jesus, we should pursue the life measuring up to God’s people, the life of Jesus, and the life of self-denial and the Cross. Who is the Counselor to do the work? The Holy Spirit. That’s why the parable concludes like this; verse 13.

 

(눅11:13)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13If you then, being evil, know how to give good gifts to your children: how much more shall your heavenly Father give the Holy Spirit to them that ask him?

 

 성령은 우리가 구한다고 우리에게 오는 게 아니예요.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일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걸 성령을 준다고 이야기 하시는 거예요.

It means although the Holy Spirit never comes to us by our asking, He comes to us and does His work through our prayer. That’s what the phrase ‘heavenly Father shall give the Spirit’ means.

 

그러니까 주기도문으로 시작하여 세 친구의 비유로 끝이 나는 누가복음 11장의 전체 내용이 뭡니까?

So, what’s the entire content of Luke, chapter 11 beginning with the Lord’s Prayer and ending with the parable of the three friends?

 

하늘의 떡을 먹은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삶, 즉 떡을 먹은 자로서의, 떡을 닮은 삶을 당연히 추구하게 되어 있는 것이며, 아버지는 반드시 그 추구를 완성시키시고 성취시키실 것이며, 그 일의 보증으로 성령, 보혜사가 와 계신다고 하는 구속사 전체를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It contains the whole story of redemption; the saints who have eaten the heavenly bread must pursue the life measuring up to the life as God’s people, that is, we saints are bound to pursue the life that resembles the bread; the Father will surely complete and achieve it; the Holy Spirit, the counselor has come to us as the guarantee for it.

 

유치하게 문을 두들기고 조르고 귀찮게 잠 못자게 하면 하나님도 귀찮아서 주신다. 보좌를 수시로 흔들면 하나님이 어지러워서 ‘야야, 그만해. 그래..줄께’…이거 아니란 말입니다.

It’s not about a childish story that if we knock on the door, pester God, irritate and disturb God’s sleep, God is compelled to give us what we want. It’s not about the story that if we rock the throne frequently, God would feel dizzy and say ‘Hey, stop it. OK, OK, I’ll give what you want’, either.

 

그런데 이미 우리에게 먹여진 그 떡의 삶이 우리의 삶 속에서 잘 나타나지 않죠?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 백성의 처우답지 않은 고난과 환난의 삶이 닥치기도 해요. 그때 어떻습니까?

However, the life of the bread already fed to us doesn’t bring out well in our life, does it? Also, we encounter some hardships and sufferings unmatched to the life of God’s people. How would you feel at the time?

 

우리는 믿음으로 알아요. 우리는 예수를 먹었어요. 우리 안에 예수가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먹었어요. 떡을 먹었어요.우리 안에 와계세요. 성령으로 와계세요.

We know by faith. We’ve eaten Jesus. Is Jesus in us or not? Jesus is in us. We’ve had Him. We have eaten the bread. The LORD is in us as the Holy Spirit.

 

근데 하나님나라는 너무 요원해 보여. 내 삶을 보면. 게다가 이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가 임한 내 삶이 너무 초라해 보이는 거예요. 그때 성도에게 오는 게 뭡니까? 낙망 이예요.

Nevertheless, the kingdom of God seems too far away when we look at our life. Moreover, our life where the Kingdom has come seems so small in this world. What comes to us saints at that time? It’s disappointment.

 

누가복음에 예수님의 사마리아 여행 과정을 그리는 내러티브 속에 여러 가지 비유가 나오는데 거기에서 누가복음에만 있는 기도에 관한 비유가 세 개가 나와요. 그게 뭔지 아세요? 오늘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이 세 친구의 비유와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 그리고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의 비유, 그 두 개는 붙어있죠? 뒤에꺼는.

In the Gospel of Luke, there come several parables in the narrative describing Jesus’ travel course to Samaria and three parables about prayers are only in Luke. Do you know what they are? They are the Parable of the three friends we’re studying today, the Parable of the persistent widow and the unjust judge, and the Parable of the Pharisee and the tax collector. The latter two are connected, right?

 

요게 누가복음에만 나오는데요, 이 세 기도에 관한 비유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요.

These three parables about prayer are stated only in the Gospel of Luke, which are connected as one.

 

자, 지금 우리가 세친구와 떡 세덩이의 비유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부했습니다. 자 이제 우리는 우리가 항상 기도하면 그 성령이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하면서 떡을 먹은 자의 삶, 그 하늘의 떡의 삶을 우리 안에서 드러낸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왜 안주시겠냐고 했으니까.

Well, we’ve studied about the parable of the three friends and the three loaves of bread enough now. We’ve learned that when we pray all the time, the Holy Spirit works hard and reveals the life of the bread eater, the life of the heavenly bread in us. It’s certain since the Bible says “how much more shall your heavenly Father give the Holy Spirit to them that ask him?”

 

그런데 우리의 삶을 정작 보면,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낙망을 할 수밖에 없어. 고난과 환난이 계속 들이닥치고 내가 나의 삶을 봐도 전혀 변해가는 것 같지가 않아요.

However, when we look at our life and the world, we can’t help being disappointed. Sufferings and hardships pounce upon us and our life doesn’t seem to change even to our eyes.

 

그때 우리가 낙망하게 되잖아요. 예수님이 그러한 상태에 비유를 하나 또 던지시는 거죠. “항상 기도하며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은…”그게 어디 있어요? 같은 누가복음에 있어요. 18장으로 가봅시다. 

At the time, we become disappointed. To that situation, Jesus is tossing another parable. “that men ought always to pray, and not to faint”, where is it? It’s in the Luke, as well. Let’s go to chapter 18.

 

(눅18:1~8)

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1And he spoke a parable to them to this end, that men ought always to pray, and not to faint;

2Saying, There was in a city a judge, which feared not God, neither regarded man:

3And there was a widow in that city; and she came to him, saying, Avenge me of my adversary.

4And he would not for a while: but afterward he said within himself, Though I fear not God, nor regard man;

5Yet because this widow troubles me, I will avenge her, lest by her continual coming she weary me.

6And the Lord said, Hear what the unjust judge said.

7And shall not God avenge his own elect, which cry day and night to him, though he bear long with them?

8I tell you that he will avenge them speedily. Nevertheless when the Son of man comes, shall he find faith on the earth?

 

이 불의한 재판관과 강청하는 과부의 비유 또한 하나님을 귀찮게 조르면 반드시 주신다는 식의 유치한 내용이 아닙니다.

The Parable of the unjust judge and the persistent widow isn’t about the childish story that if we pester God irritatingly, God would surely give us what we ask, either.

 

그 내용을 잘 보시면 불의한 재판관과 선한 하나님, 그리고 과부와 택한 자가 대조가 되어 있습니다.

Reading the story carefully, we can notice the unjust judge and good God, the widow and the chosen ones are contrasted.

 

불의한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아주 불성실한 재판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성실한 자가 과부의 강청이 귀찮아서 그의 소원을 들어 줍니다.

The unjust judge was unfaithful who didn’t fear God, ignoring people. Then, such a faithless man granted the widow’s wish not to be bothered by her. 

 

그것과 대조해서 선하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은 택한 자들이 밤낮 부르짖고 있는 그 내용을 이미 아시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밤낮 부르짖지 않아도 반드시 그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대조인 것입니다.

By contrast with him, good and faithful God answers the prayers His chosen ones cry out for day and night since He already knows what they are.

 

왜냐하면 성도의 기도는 모두가 하늘의 떡에 대한 기도인데 그 떡은 이미 주어졌을 뿐 아니라 가시적으로도 완전하게 우리를 점령해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에 의해서? 떡에 의해서. 우리는 떡이 될 거예요 이 세상에서. 떡되서 죽을 거예요. 떡이 우리를 점령해버린단 말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It’s because the prayers of saints are all about the heavenly bread, which has been given to us and will occupy us completely visibly. By whom are we seized? By the bread. We’ll be the bread in this world. We’ll die as the bread. The bread will subdue us and that is the covenant of God.

 

그런데 가끔 그러한 확정된 현실이 의심으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아니, 가끔이 아니라 너무 자주 그렇죠? 마치 하나님이 불의한 재판관처럼 느껴질 때가 있단 말입니다.

Then, sometimes such a determined reality seems to be doubtful. Nay, not sometimes but so frequently, right? We feel like God is the unjust judge at times.

 

우리의 요구와 청원을 귀찮아 하셔서 마냥 침묵하고 계신 분처럼 느껴질 때가 있잖아요, 우리한테.

We feel that God is just silent to us all the time thinking our requirements and plead a great trouble.

 

왜 하나님은 내 기도를 안들어주실까? 왜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실까?  우리에게 하나님이 그 불의한 재판관처럼 느껴질때가 있단 말이예요.

‘Why God doesn’t listen to my prayer? Why God keeps silent?’ We feel that God is like the unjust judge from time to time.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은 그렇게 일을 하신단 말입니다. 거기에 믿음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이고, 그 믿음을 선언하고, 더욱더 공고하게 다지는 것이 바로 기도라는 거예요.

And actually, God does His work in that way. God’s way requires our faith and the prayer is the thing that proclaims faith and strengthens it.

 

여러분, 기도는 내가 뭔가를 요구해서 얻어내는 것을 1차 목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발 똑바로 알아들으세요. 기도는 means of grace, 은혜가 쏟아지는 수단이예요, 통로.

Everybody, the primary aim of the prayer isn’t to win what we ask from God. Please understand it correctly. The prayer is the means of grace, the passage.

 

그러니까 우리는 기도를 함으로써 ‘하나님, 나는 믿어요. 나는 지금 이렇게 낙망하고 의심하고 있지만 하나님, 나에게는 언약이 주어졌잖아요. 내가 그걸 믿었잖아요. 그리고 나는 아직도 하나님을 놓지 않고 있잖아요. 하나님, 저는 제가 지금 비록 이렇게 낙망하고, 이렇게 의심한다 할지라도 저는 하나님 나라가 분명히 완성될 것을 믿고 있고, 제가 하나님 나라로 완성될 것을 믿어요.’ 가 내 신앙고백이고 기도인 것입니다.

So, it is our confession of faith that we pray ‘God, I have faith. Although I’m disappointed and doubtful like this now, I know Your covenant has been given to me. I believe it and I still hold of You. God, even if I’m disappointed and doubtful, I firmly believe that the Kingdom will be completed and I’ll be completed as the Kingdom.’

 

뿐만 아니라 그 나라는 분명히 올 것 이라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 언약에 대한 선포, 그것이 기도입니다.

Moreover, the proclaim of God’s covenant to the world that the Kingdom will surely come, that’s the prayer.

 

그런데 우리 삶에 너무 자주 의심과 낙망이 오니까 항상 기도하게 되는 거예요. 기도하지 않아도 들어주실 것이지만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기도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단 말입니다.

However, we become doubtful and disappointed in our life so much that we have to pray all the time. Although we don’t pray, God will answer to us anyway, but God gave us the prayer due to our weakness.

 

그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공고히 믿음 위에 서고, 다시 한번 언약을 확인하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기도하되 낙망하지 말라는 거예요.

Through praying, we can stand on faith firmly and make sure of the covenant again. That’s the reason we should always pray but not to faint.

 

왜? 항상 기도하는데도 안 들어줄 수도 있으니 낙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니라면, ‘항상 기도해, 그러면 절대 낙망할 일 없을거야’로 시작해야 되잖아요.

Why? It means God wouldn’t possibly answer to our prayers, so we shouldn’t be disappointed. If not, it should be said ‘Pray always, then you won’t disappointed.’

 

근데 ‘항상 기도하되 낙망하지 말 것은’…으로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서 은닉되어 있기 때문이예요. 하나님 나라의 은닉성, 겨자씨처럼, 누룩처럼 은닉되어 있단 말입니다.

However, the verse starts with ‘men ought always to pray, and not to faint.’ Why? It’s because the kingdom of God is concealed in this world. The concealment of God’s kingdom, concealed just like a mustard seed and yeast.

 

밭에 감추어져 있단 말입니다 그 보화가. 그리고 그 보화는 질그릇 속에 감춰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질그릇으로 폭로가 되야 하나님의 보화됨이 드러나는 것 아닙니까?

The treasure is hidden in the field. And since the treasure is concealed in earthenware, we saints should be exposed as the earthenware to reveal God’s becoming treasure, right?

 

그래서 아까 우리 찬양했잖아요. 약할 때 강함 되시네. 그게 ‘나는 질그릇이예요, 하나님만 보배예요’, 이걸 고백하는 거예요, 그게.

That’s why we praised the song ‘You are my strength when I’m weak’ just now, right? That’s the confession ‘I’m earthenware and only God is the treasure’.

 

근데 전부 자기들이 보배가 될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완전 쓰레기가 되어 버렸어요. 보배 속의 쓰레기.

Then, since everybody tries to be the treasure himself, God has been a trash. The trash in the treasure.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

It’s wrong, everybody.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는 믿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항상 기도하며 인내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쉬운 그림으로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이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예요.

That is, the Parable of the unjust judge and the persistent widow is pictorializing it to us easily that we should pray and be patient with assurance to wait for the kingdom of God.

 

이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 바로 앞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잠깐만 보고 갈까요? 누가복음 17장 보세요, 20절.

Shall we have a look the content right before the Parable of the unjust judge and the persistent widow? Let’s read Luke, chapter 17, verse 20.

 

(눅17:20,22,25,33)

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 하리라 (인자의 날 하루라는 것은 메시아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시대의 절정, 심판의 날이라는 뜻이고, 못 본다는 뜻이예요 너희는.)

25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되어야 할 지니라 (누가? 예수가.)

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20Once, on being asked by the Pharisees when the kingdom of God would come, Jesus replied, “The coming of the kingdom of God is not something that can be observed,

22Then he said to his disciples, “The time is coming when you will long to see one of the days of the Son of Man, but you will not see it. (One of the days of the Son of Man means the climax of the time of Jesus Christ as Messiah, the Judgment Day, which we can’t see.)

25But first he must suffer many things and be rejected by this generation. (Who? Jesus!)

33Whoever tries to keep their life will lose it, and whoever loses their life will preserve it.

 

너희도 내 삶을 그대로 쫒아오게 될거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That is, Jesus says ‘you have to follow my life as it is’.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면서, 그런데 그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고 이런 이야기를 해놓고 나니까 예수님이 마음이 안좋으신 거예요.

After explaining the Kingdom, Jesus felt sorry for them to say such stories in the verses.

 

그러니까 거기에다 비유를 하나 딱 붙여주신 것이 ‘항상 기도하며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은’…인거예요. 그게 누가복음 18장입니다.

So, the LORD Jesus added the parable starting with “men ought always to pray, and not to faint”, which is Luke, chapter 18.

 

이 비유도 역시 우리가 오늘 서두에 공부했던 누가복음 11장의 떡 세 덩이와 세 친구의 비유에서 흘러나온 것입니다.

This parable also flowed from the Parable of the three friends and the three loaves of bread in Luke, chapter 11, which we studied in the beginning of today’s lecture.

 

은닉되어 있는 하나님 나라, 그 나라 때문에 때론 낙심이 되어 기도하고, 여전히 같은 모습인 것 같은 자신의 모습 때문에 기도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속히 이루실 하나님의 언약과 전능하심을 믿기에, 그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The kingdom of God which is concealed, for that Kingdom, we are discouraged and pray, we pray for ourselves that still look the same, and nevertheless, since we have faith in God’s covenant that will be achieved and His almightiness, we pray with that faith.

 

역시 무엇을 구하는 기도죠? 떡!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예수라는 떡을 구하는 기도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들의 나라이니까요.

Pray for what? The bread! It’s for the prayer for asking Jesus the heavenly bread who will complete the Kingdom, since it is the Kingdom of the Son.

 

그래서 그 비유가 어떻게 끝난다? ‘내가 다시 올 때 그런 믿음을 보겠느냐’…왜?

So, how the parable end? “Nevertheless when the Son of man comes, shall he find faith on the earth?”

Why?

 

그 삶이 너무 힘들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삶을 끝까지 해 낼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말입니다.

It means since the life is so hard that few people will bear it to the end.

 

신앙생활은 그만큼 힘들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들만 끝까지 간단 말입니다.

The life of faith is that much hard. Only the chosen ones by God can bear to the end.

 

세상에 내가 다시 올 때 그런 믿음을 보겠느냐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성도야, 너희들의 신앙생활은 그만큼 힘들꺼야’라는 말씀인 거예요.

The word Jesus said “Nevertheless when the Son of man comes, shall he find faith on the earth?” means ‘You saints, your life of faith will be harsh that much’.

 

그런데도 ‘내가 택한 이들은 반드시 인자의 날의 그 절정, 그날을 보게 해줄꺼야.’ 그거예요. 그래서 이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가 믿음으로 끝나는 거예요, 여러분.

Nevertheless, ‘the chosen ones shall see the climax of the time of Son of Man.’ That’s it. That’s the reason the Parable of the unjust judge and the persistent widow ends with faith, everybody.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또 하나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도의 원한 이라는 것입니다. 그 과부가 원한이 있었잖아요. 근데 우리 성도가 원한이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우리 성도의 원한은 어떤 원한일까요?

Here appears another thing we shouldn’t overlook. That’s the resentment of saints. The Bible says the widow had a grudge, but does it make sense we saints have a grudge? What resentment do we saints have?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고 이웃이 해를 입히거든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근데 무슨 놈의 원한 이예요? 성도가 어떤 원한을 갖고 있어요?

God demanded that you should love our neighbor just like ourselves and forgive them seventy-seven times when they sin against us. Then, what kind of resentment is that? What grudge do saints have?

 

심지어 하나님 나라에서도 제단 밑에, 제단 밑이라는 것은 제물로 죽은 이라는 뜻 이예요, 제단 밑의 영혼들, 성도의 영혼들이 신원하여 ‘우리의 원한을 풀어주세요’ 하고 기도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Even in the kingdom of God, under the altar, meaning slain as a sacrifice, there are souls of saints praying for redressing a grievance, ‘avenge our blood, please.’

 

그 원한이 어떤 원한일까요? 계시록 6장에 보면 잘 나와있지요?

What revenge is that? It’s well addressed in the Revelation, chapter 6, isn’t it?

 

그 원한은 창세기 4장에서부터 연결이 되는 거예요. 가인이 아벨을 때려죽였을 때, 아벨은, nothing 이라는 뜻 이예요,하벨, 히브리어로.

That revenge is connected from Genesis, chapter 4, when Cain beat Abel to death. Abel means ‘nothing’, Habel (הָ֑בֶל) in Hebrew.

 

nothing인 자가 세상의 힘을 상징하는 가인, 가인은 ‘나는 힘이 있으며 내 힘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줄 수 있다’는 아담의 맏아들, 아담 이예요, 그 자체가, 세상 이예요.

The man who was nothing was beaten to death by Cain that represents the power of the world. Cain is Adam’s first son symbolizing ‘I have my own power, and I can make God happy with my power’, who represents Adam and the world itself.

 

세상에게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의인이 맞아 죽는 거죠. 그런데 그 아우의 피, 아벨의 피, 의인의 피가, 땅속에서 신원을 하고 있다고 해요. 창세기 4장 10절에 보면.

The righteous person chosen by God is beaten to death by the world. Then, the blood of the little brother, the blood of Abel, the blood of the righteous is crying out to God from the ground in Genesis, chapter 4, verse 10.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속에서 나에게 호소한다고 그러잖아요. 그게 신원이거든요.

It says “Listen! Your brother’s blood cries out to me from the ground.” That’s the redress of a grievance.

 

그 신원이 어떤 신원이겠어요? ‘하나님, 저놈이 나 죽였으니 빨리 복수해주세요’, 그런 신원이었을까요?

What kind of redress is that? ‘God, since he killed me, please get even with him ASAP!’, this kind of revenge?

 

 아닙니다. 아벨의 신원, 성도들의 신원, 제단 아래 영혼들의 신원이라는 것은 의에 대항하는 죄에 대한 원한에 대해 얘기하는 거예요.

Not at all. Abel’s redress of a grievance, saints’ redress of a grievance and the redress of a grievance of the souls under the altar are referring to the resentment of the sin against righteousness.

 

그런데 계시록을 보면 ‘하나님, 언제 우리의 신원을 해결해 주실 거예요?’ 물으니 ‘지금 땅에 있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이 다 죽으면’…이래요.

In the Revelation, when the souls under the altar called out in a loud voice, “How long, Sovereign Lord, holy and true, until you judge the inhabitants of the earth and avenge our blood?”, God replied, until the full number of your fellow servants, your brothers and sisters, were killed just as they had been.”

 

세상을 죽여야지, 왜 그 아래에 있는 불쌍한 성도들의 형제를 다 죽이냐 말이예요.

The world should be killed, then why the brothers and sisters of the saints under the altar have to be killed?

 

그들이 다 죽을 때까지 너희들의 신원은 안 풀어 진다는 거예요.

It means not until all of the siblings are dead that our resentment will be satisfied.

 

왜 그들을 죽여야 되죠? 다시 한 번 묻습니다.

Why do they have to be killed? I’ll ask you once again.

 

여러분, 우리 성도가 이 세상에서 이 억지 같은 힘의 원리, 이 세상의 삶의 원리를 보면서 굉장히 불쾌하고 또 왜 하나님은 아직까지도 이러한 더러움과 추악함과 죄악을 그냥 두고 보실까 하는 안타까움도 있고 그렇죠.

Everybody, watching the unreasonable principle of the power and life in this world, we feel discomfort much and sorry thinking why God just let such dirtiness, ugliness and sins ride, don’t we?

 

그리고 왜 하루속히 완성되지 않을까, 이 하나님의 나라는…거기에 대한 초조함도 있어요.

Also, we become impatient thinking ‘why God’s kingdom won’t be completed immediately…?’

 

그런데 그러한 것들이 어디에서 제일 많이 발견됩니까? 내 안에서.

Then, where can we find such things most? In ourselves.

 

다른 거 볼 필요도 없이, 다른 사람들은 얼마든지 연극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저 사람들은 그래도 좀 괜찮은가봐 하지만,나는 나를 속일 수 없어요.

No need to look at others. Since others can play as much as they like, we can assume they’re better than us, but we can’t deceive ourselves.

 

나는 나에게 가장 밝히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폭로당합니다.

We’re bound to be revealed to ourselves most frankly. Our true nature is revealed.

 

그 죄가 ‘하나님 없이도 나는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고, 하나님 없이도 나는 내 스스로의 힘으로 하늘나라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이 죽일 놈의 이기주의, 인본주의가 내 속에 가장 강렬하게 자리잡고 있어요.

The sin of thinking ‘without God, I can live happily in the world, reaching the Kingdom for myself’, the damn selfishness and humanism, lies in us most intensively.

 

하나님이 철장을 가지고 오셔서 바로 그 마귀적 속성을 죽여가시는 거예요. 그게 세상을 죽이는 겁니다.

God comes to us with an iron bar and kills the evil attribute in us. That’s the killing of the world.

 

그러니까 그 신원. 그 원한은 언제 다 해결될 수 있어요? 내가 죽을 때, 세상이 죽을 때 완전히 해결이 되는 거예요.

So, the redress of a grievance, when can it be solved? When we die, when the world die, it can be solved perfectly.

 

근데,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보면 절대 안 죽을 거 같잖아요. 이 세상은 계속 이렇게 패역하게 흘러갈 것 같애. 그리고 나는 절대로 하나님의 자녀로 완성이 안 될거 같애. 예수를 40년 믿었는데 변하기는 개뿔이나 하나도 안 변했어.

However, when we look at ourselves, we don’t seem to die. The world seems to keep going rebellious. And, we never seem to be perfected as God’s children. Despite believing in Jesus for 40 years, we haven’t changed jack a bit!

 

그때 뭐 하라는 거예요? 항상 기도하며 낙망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게 성도의 원한입니다

What should we do then? Pray all the time, not being disappointed. That’s the resentment of saints.

 

성도의 유일한 원한, 죄에 대한 원한, 나의 미성숙함에 대한 원한.

The only grudge of saints, the resentment against sin, the grudge against our immaturity…

 

그러나 ‘나는 불의한 재판관 아니야. 너희들에게는 내가 불의한 재판관처럼 보일 수 있어. 그러나 나는 너희들의 아버지야. 내가 그 기도 안 들어주겠어? 걱정하지마. 항상 기도하며 낙망치 마라.’

However, God says ‘I’m not the unjust judge, though I might seem to you one. But, I’m your Father. Don’t you think I will answer to your prayer? Don’t worry. Just pray all the time not to faint.’

 

이게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예요.

This is the message of the Parable of the unjust judge and the persistent widow.

 

그러면 한번 보자구요. 내가 이 죄에서, 인본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가 하나님 말고 다른데 마음을 두고 있는 그런 나의 죄성을 하나하나 끊어 내야되죠?

Let’s see it. To get out of the sin and humanism, we must cut off our sin that put our mind to something else instead of God, don’t we?

 

그러니까 하나님 이외에 내 마음을 빼앗고 있는 것들이 하나하나 끊어져 나가야 해요. 그게 기도의 응답이예요. 그렇지 않아요? 그게 항상 기도하며 낙망치 말아야 할 기도의 내용이잖아요.

So, besides God, everything enthralling us must be cut out one by one. That’s the answer to our prayer, isn’t it? That’s the prayer we should always pray not to be disappointed.

 

그런데 강청해서 얻어내자? 이게 마귀새끼들인 거예요. 책도 나왔어. 이게 마귀새끼란 말입니다.

Then, earn more through importunity? They’re the bastard from hell. Even some books have been published about the importunity. They’re the sons of Satan!

 

완전히 다른 얘기를 하고 있잖아요. 성경을 거꾸로 보고 있는 거예요. 인간 중심으로 성경을 보느냐, 하나님 중심으로 성경을 보느냐는 이렇게 극명하게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They’re telling a totally different story. They’re reading the bible upside down. According to whether to see the Bible from human-centered view or from God-centered view, there comes a stark difference just like that.

 

성경 어디에 땡깡 부리면 무조건 준다는 내용이 있어요? 아무거나 찾아서 갖고 오세요. 다 풀어드릴 테니깐. 그런 거 없어요.

Where about in the Bible is such a story of earning everything through badgering? If you find it, just bring it to me. I’ll explain it. There is no such a story in the Bible.

 

하나님이, 떡이 여러분을 점령해서 이 세상에서 떡쳐서 죽이는 거예요.

God, the heavenly bread will occupy you and kill you pounding as the bread.

 

그 때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살아나게 되는 거예요. 그 일을 위해 예수가 오신 거고 성령이 여러분 안에 와계신 거고, 하나님은 반드시 완성을 하실 거예요.

Right that moment, your old selves die and become alive as the new ones. For doing it, Jesus came and the Holy Spirit is in you, and God will surely complete it.

 

그걸 믿으며 오늘 내가 조금 낙망이 되고, 오늘 내가 조금 의심이 되도 기도로 다시 회복을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이 비유의 진의입니다.

Believing it, even though we become a little bit discouraged and doubtful today, we can restore through the prayer. That’s the true meaning of this par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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