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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19-기드옷, 성령의 옷을 벗고 에봇을 입다, 그리고 망하다(삿 6:34, 8:27)

설교내용

 사사기(19)

기드온, 성령의 옷을 벗고 에봇을 입다, 그리고 망하다

 

(6:34, 8:27)

34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 족속이 다 모여서 그를 좇고

27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서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니라

 

오늘은 인간 기드온의 불가능함이 어떻게 절정에 이르게 되는지에 관해 공부를 함으로 해서 기드온으로 대표되는 우리 하나님 백성들의 불가능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위를 덮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크기와 넓이와 높이와 깊이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 안에서 이 역사 속에 펼쳐지는 묵시의 현실을 보고 있노라면 한 가지 분명한 법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이는 것들을 들어서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하시고, 보이는 것을 부정해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시는 방법으로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속의 대단한 인물들이나 위대한 사건들의 결국이 우리의 기대와는 사뭇 다르게 맺어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현실을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고후4:18)

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을 들어서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시고 구원의 복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하신 후 수많은 첩을 거느리고 또 다른 자식들을 낳는 아브라함의 말년을 기록함으로 말미암아 인간 아브라함을 향한 성경 독자들의 기대와 추앙을 불식시켜 버리시고, 다윗이라는 인물을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희생의 십자가를 설명하신 후 그의 추악한 모습을 폭로해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역시 인간 다윗을 부정해 버리십니다. 솔로몬이라는 인물을 들어서 예수를 설명하시고는 우상을 섬기는 말년의 솔로몬을 자세하게 그려 놓음으로 해서 그 역시 부정해 버리십니다. 그러한 역사의 과정 속에서 역사는 부정되고 묵시 속의 예수만이 오롯하게 드러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 방법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드온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추악한 죄인으로서 적나라하게 폭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공로가 예수께로 돌아가고 기드온은 300의 자리로 내려가 그 예수의 은혜로 덮여 구원을 받는 피조물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기드온이 미디안 연합군을 대파하고 승리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확인했다시피 그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사건과 상황 뒤에서 그것들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영역의 것을 보지 못하는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기능적으로, 예표적으로 들어 쓰시는 실물 예시의 모형들에게 공로와 존경과 사랑을 보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 안에 등장하는 누구를 본받자, 누구처럼 살자라는 엉뚱한 다짐들을 내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기드온과 300인의 병사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기드온과 미디안의 전쟁의 배후에서 언약의 수호자로 홀로 싸우신 하나님을 발견하기 보다는 기드온과 300인의 병사를 본받겠다는 다짐만 우후죽순처럼 쏟아집니다. 심지어 성경이 기드온의 이야기 안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그러한 이들의 행사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끝까지 본받을 인간을 찾아 나섭니다. 그게 인본주의의 인간 가치 챙기기의 집요함이며 어리석음인 것입니다.

 

300의 병사로 135천 명의 미디안 연합군을 무찌른 기드온에게 당연히 모든 관심이 집중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기드온의 뒤에서 그 전쟁을 지휘하신 하나님께 찬송을 돌린 것이 아니라 기드온에게 모든 찬사와 칭찬을 쏟아 붓습니다. 심지어 그에게 찾아가 왕이 되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8:22)

22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하늘의 왕을 보지 못하는 땅의 소경들이 자신들의 육적 자아를 살찌게 해 줄 땅의 왕을 세우려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왕이 없는 자라고 부릅니다. 사사기의 결론이 어떻게 맺어지는지 볼까요?

 

(21:25)

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 어절은 사사기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어절입니다. 이 어절이 사사기의 주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 자신들을 보호해주고 지켜줄 이 세상 왕들에게 자신들의 안위와 행복을 맡기는 모든 아담 군상들의 모습이 바로 왕이 없어서 자기가 원하는 삶을 자기 마음대로 사는 죄인들의 모습이라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누구보다 그 전쟁이 자기의 힘과 지혜로 치러진 전쟁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칭찬을 받다 보니 자기도 자기 자신을 칭찬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게 선악과 사건 이후 자아 숭배에 빠진 죄인들의 보편적 모습인 것입니다. 전쟁 후의 그의 행사를 한 번 보세요.

 

(8:30~31)

30 기드온이 아내가 많으므로 몸에서 낳은 아들이 칠십 인이었고

31 세겜에 있는 첩도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 이름을 아비멜렉이라 하였더라

 

기드온이 아내를 많이 두어 아들만 70명을 낳았습니다. 다윗이 10여 명의 아내를 통해 열일곱 명의 아들을 낳은 것을 감안해 볼 때 70명의 아들을 낳은 기드온의 아내가 적어도 스무 명은 넘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고대시대에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지닌 사람이 자기의 재산과 권력을 지키기 위해 정략결혼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 같은 사람도 아내가 1,000명이나 되었던 것입니다. 기드온이 지금 왕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첩을 통해서도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 이름을 아비멜렉이라고 짓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내 아버지는 왕이다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름은 지은, 아이의 아버지인 기드온이 스스로를 왕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기드온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찾아가서 왕이 되어 달라고 했을 때 거절을 하는듯한 뉘앙스의 대답을 한 것인가?

(8:23)

23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겉으로만 보면 기드온이 왕의 자리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이지요? 그런데 그의 행사의 면모를 보면 그는 왕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행동을 합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당시 이스라엘의 율법에는 백성이 왕을 선출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 세우시고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아야만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백성이 세우거나 스스로 왕이 된 자는 언제든지 폐위시킬 수 있었습니다.

 

(17:14-15)

14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서 그 땅을 얻어 거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열국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우리라는 뜻이 나거든

15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사사였습니다. 사사 정도 되면 하나님의 율법이 이스라엘의 왕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확실하게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정당한 절차도 거치지 않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가는 나중에 큰 망신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는 정당한 절차를 거쳐 왕이 되기 위한 음모를 꾸밉니다. 그게 다름 아닌 에봇 사건입니다. 그가 에봇을 어떻게 만듭니까?  

 

(8:24~26)  

24 기드온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청구하노니 너희는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내게 줄 지니라 하니 그 대적은 이스마엘 사람이므로 금귀고리가 있었음이라

25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가 즐거이 드리리이다 하고 겉옷을 펴고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그 가운데 던지니

26 기드온의 청한바 금귀고리 중수가 금 일천 칠백 세겔이요 그 외에 또 새 달 형상의 장식과 패물과 미디안 왕들의 입었던 자색 의복과 그 약대 목에 둘렀던 사슬이 있었더라

 

기드온이 이스라엘의 전리품 중 금귀고리를 모읍니다. 이스라엘의 전리품 중, 금은 하나님과 제사장들에게만 돌아가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자신에게 금을 가져오라고 하지요? 그리고는 그 금으로 에봇을 만들어 성막이 아닌, 자기가 거하는 성에다가 둡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에봇은 제사장의 옷입니다. 그 중에서도 열두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보석을 붙인 흉패 바로 밑에 입는 조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모형하고 있던 기능적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그렇지만 특히 그 에봇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열리게 되는 지성소의 휘장을 모형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8장을 보면 제사장의 옷이 정확하게 성막의 반대방향으로 지어집니다. 거기에 쓰이는 재료도 똑같고 순서도 똑같습니다. 그런데 방향만 반대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다른 점이 있습니다. 성막에는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휘장에 그룹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지성소를 상징하는 제사장의 흉패 바로 안의 에봇에는 그룹들이 새겨져 있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아주 심오한 메시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에 그룹들이 새겨져 있었던 것은, 전에도 설명해 드린 것처럼, 에덴동산의 생명나무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의 나무가 되었기 때문에 그 생명나무를 그룹들과 화염검이 지키고 있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 그것에 접근하는 자들은 다 죽습니다. 그래서 일 년에 한 번 대 제사장이 들어가는 것 말고는 그 어느 누구도 그 지성소에 발을 들여 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런 일이 발생을 할 때에는 그게 누구라 할지라도 그 즉시 사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저주의 나무로 돌격해 들어가십니다. 그리고는 그 생명나무의 저주를 받아 그 저주의 나무에 달려 죽어 버리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저주의 나무를 다시 생명나무로 환원시켜 버리신 것입니다. 그 저주의 나무, 십자가에서 교회의 생명이 잉태된 것이 바로 그 현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13)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바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의 결과로, 그 생명나무로 향하는 길이, 십자가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열리게 된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저주가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그들에게는 그 생명나무가 축복의 나무로 다시 환원이 됩니다. 그러한 회복된 천국의 현실을 에스겔이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47:12)

12 강 좌 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

 

만물을 소성케 하는 강 좌 우 편의 나무들이 바로 생명나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그림이 요한계시록에 그대로 펼쳐져 나타납니다.

 

(22:1~3)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이렇게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 막고 있던 휘장이 완전히 찢어져서 이제 천하만국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수시로 지성소로 드나들게 된 사건, 아니 그들 자신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지성소가 된 사건을 성소의 휘장과 제사장의 에봇이 모형으로 그려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막의 지성소에는 일 년에 단 한 번 이스라엘의 대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막을 옷으로 입고 있는 대 제사장의 목에 걸린 흉패에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이름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흉패는 정사각형입니다. 성막에서 정사각형, 정육면체는 지성소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지성소에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가 보석처럼 박혀 있는 것입니다. 성막의 지성소에는 대 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그것도 완벽한 정결 예식과 온전한 제물의 피를 가지고서야만 들어갈 수 있었는데 대 제사장의 흉패에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상징하는 열 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보석이 박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지성소에 들어가 있는 모습입니다. 아니 지성소와 이스라엘이 하나로 연합이 되어 있는 형국입니다. 그 대 제사장의 흉패가 이야기 하고 있는 내용을 요한계시록이 이렇게 풀어주고 있습니다.

 

(21:16)

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이것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묘사해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백성, 즉 천상의 교회, 묵시 속의 완료된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들이 보석처럼 빛나는 곳이 천국입니다.

 

(21:9~11)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보세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보석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은 보석으로 치장이 되어 있는 곳이 아니라 보석같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곳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성을 척량했더니 장과 광과 고, 즉 길이와 넓이와 높이가 정확하게 일만 이천입니다. 정육면체입니다. 성막의 어디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지성소입니다. 지성소가 다른 부분을 다 흡수 통합해 버린 모습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이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지성소를 가리키는 그 성이 길이와 넓이와 높이가 일만 이천입니다. 정육면체의 면은 총 몇 개지요? 열두 개지요? 그 열두 개가 다 일만 이천이라는 것입니다. 일만 이천 곱하기 열둘은 얼마입니까? 144,000입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교회가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계시록 7장에 미리 등장합니다.

 

(7:4-8)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 사 만 사천이니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이 부분과 계시록 21장의 내용을 연결시켜서 보셔야 합니다. 여기 보시면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가 등장하고 그 열 두 지파 각각에서 하나님의 인을 맞은 자가 일만 이천입니다. 그걸 다 곱하면 144,000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44,000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총 수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숫자인 것이지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구원받을 민족적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가 아닌 것입니다. 일만 이천은 열두 지파, 열두 사도로 예표 되었던 하나님의 백성들의 총수를 가리키는 것이고 거기에 곱해진 1,000은 완전수 10이 하나님의 수 3으로 세 번 곱해진 것입니다. 따라서 일만 이천이라는 것은 완전하고 또 완전한 하나님 백성의 총수를 가리키는 것이고 거기에 열둘이 곱해졌다는 것은 이 역사 속에 던져졌던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총수가 이만큼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숫자는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각 지파에서 12,000명씩 만입니다. 모두 다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이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땅에서 하나님의 신부로 영광을 누리며 살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대 제사장의 옷 맨 바깥에 위치하고 있던 보석이 박힌 정사각형의 흉패가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지금 제가 왜 에봇에는 성막의 휘장에서처럼 그룹들이 새겨져 있지 않은지와 지성소를 상징하는 제사장의 흉패에 어떻게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지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잘 보시면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가 조금 이상하지요? 단 지파가 빠져 있고 엉뚱한 므낫세 지파가 거룩한 성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왜 단 지파가 빠져 있을까요? 그건 이미 창세기에서 예고가 된 것이었습니다.

 

(49:16~17)

16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17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잘 보세요. 단은 이스라엘을 무는 뱀이요 독사의 역할을 하기 위해 이스라엘에게 투입이 된 지파입니다. 16절을 보시면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같이라는 어구가 나오지요? 그것은 단 지파를 이스라엘의 지파로 위장시켜 투입을 시켰다는 뉘앙스를 풍기지요? 그 단 지파가 이스라엘인 척, 이스라엘 속에서 제 역할, 즉 뱀의 역할을 다 마치고 빠져 버리지요? 그리고는 엉뚱한 므낫세 지파가 열 두 지파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때 므낫세 지파의 입장에서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그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지요. 자기들은 원래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닌 외인이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아무 공로 없는 므낫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이 된 것입니다. 그게 로마서 11장 전체에서 아주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 중 몇 절만 볼까요?

 

(11:25-28)

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28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잘 생각해 보세요. 원래 돌 감람나무였던 므낫세 지파가 참 감람나무에 거저 접붙임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들로 편입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뭐 잘한 게 없어요. 그냥 돌 감람나무로 살고 있었는데 참 감람나무의 패역함이 드러나자 그 자리로 거저 편입이 된 겁니다. 그들이 바로 이방인입니다. 구약의 열 두 지파로 설명이 되던 하나님의 백성들의 자리로 투입이 된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이 다 버려진 것이냐? 아니지요?

 

(11:1-5)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하니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이스라엘 중에도 남은 자가 있습니다. 그들도 다 구원에 이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나중에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거기에서의 온 이스라엘이란 육적 이스라엘 안에 들어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고, 그들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완성되게 될 하나님 백성들의 총회를 가리키는 것이지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모든 육적 이스라엘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므낫세처럼 거저 구원 얻은 이방인들도, 완전히 버려진 줄 알았다가 구원에 이르게 되는 육적 이스라엘 중의 남은 자들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 은혜를 찬송하며 하나님 나라로 입성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당신의 구속사역을 이런 모양으로 이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귀와 그로 비롯되는 악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인 것이지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우발적인 것들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역사는 하나님 연출의 하나님 자작극인 것입니다.

그건 열 두 사도 속에서도 예표 되고 있었습니다. 열 두 사도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마귀가 한 마리 끼어 있었지요? 단 지파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속에서 뱀의 역할을 했다면, 열 두 사도 중에서 뱀의 역할을 한 사람이 유다입니다. 유다가 마귀로 드러나자 그 자리를 누가 메웁니까? 맛디아가 메웁니다. 그러나 맛디아는 열둘이라는 숫자 위에 내려져야 하는 성령의 강림 시기에 맞추어 숫자 충원의 존재로 열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사후 행적이 묘연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사실적으로 그 유다의 자리는 사도 바울이 채웁니다. 그래서 그 빈자리를 채우는 사도가 이방인의 사도로 활약을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은 원래 이스라엘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의 구원은 그야말로 은혜에 의한 것이잖아요? 그 이방인이 바로 신약의 교회란 말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육적 이스라엘 속에 남아 있는 남은 자들도 역시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남아 있는 육적 이스라엘의 남은 자나, 아무런 공로나 자격이 없이 이스라엘의 빈자리로 들어온 이방인들이나 모두 교회의 죄악상과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담고 있는 역사적 실물 예시의 모형들인 것입니다. 교회는 오직 은혜로만 구원에 이르는 것이며, 그들의 죄악이 사라지거나 개선되어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덮으심의 은혜로 남은 자가 되는 것임을 그 두 부류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11:11~13)

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 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 이니라

12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 이리요

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 이야기가 아가서에서 예루살렘 여자들과 술람미의 이야기로 또 한 번 예표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술람미는 포도원에서 노예로 일을 하던 검둥이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여자들, 즉 솔로몬의 정실부인들이 부정되고 술람미라는 이방 여자가 솔로몬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입니다. 술람미가 뭘 했다고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왕인 솔로몬이 그냥 사랑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격 있고 예쁜 예루살렘 여자들이 솔로몬을 더 사랑하겠습니까? 아무런 자격도 없는 자신의 실체를 알고 있는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더 사랑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겠습니까? 당연히 술람미 여인이지요? 바로 그것입니다. 교회는 신랑의 은혜와 사랑으로 거저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루살렘 여자들이 다 버림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각자가 자기의 역할에 충실하다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만 하나님의 신부로 입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삶 속에서도 그 똑같은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 여전히 그들의 마귀적 본성을 놔두십니다. 뱀이, 마귀가 성도 안에 살게 놔두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죽어 마땅한 뱀에 불과한 존재임을 자각하게 만드세요. 사도바울이 자신을 가리켜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한 것이나, 자기 안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고백을 한 것이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작품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러한 처절한 자아 인식 위로 다가가셔서 은혜의 복음으로 그것을 덮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세리, 창기, 이방인과 같은 죄인들, 아무런 자격도 없고 조건도 갖추지 못한 그런 자들을 값없이 부르시는 것이 구원이며, 은혜이며, 사랑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검다는 것은 항상 죄를 상징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술람미가 검은 여인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검은 것은 그렇게 죄로 말미암아 사망으로 던져져야 맞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하늘 왕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이방인들이 하늘 백성으로 편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그 이야기는 모세의 이야기에서도 한 번 등장했던 이야기입니다.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습니다. 그건 모세의 취향이 독특해서가 아닙니다.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기능적 중보자의 역할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검둥이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이 술람미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런데 미리암이 바리새인의 역할을 합니다. 웬 검둥이냐는 것이지요. 그때 하나님께서 미리암을 문둥병자로 만들어 버리십니다. ‘너는 뭐가 잘나서 구원 받은 줄 아니? 너도 문둥이에 불과한 사람이다. 그런데 은혜로 출애굽을 한 것이란다. 그런데 네가 감히 검둥이를 무시해?’이것이 바로 미리암과 구스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성경이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똑같은 잘못을 하지요? ‘저는 저 세리와 같지 않게 만들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그 자들을 마귀의 자식, 독사의 새끼라고 저주를 해 버리십니다. 네가 문둥병자인데 누구를 욕하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은혜로 구원을 받아 하늘의 보석이 된 죽은 흙들의 축복의 자리인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지성소와 휘장, 제사장의 에봇과 보석 흉패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막의 휘장에 그려져 있던, 지성소를 가로막고 지키던 그룹들은 어떻게 사라지게 되고 보석과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성소에 입성할 수 있게 된 것인가?

 

(28:1-12)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 곧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되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서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지니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그들의 지을 옷은 이러하니 곧 흉패와 에봇과 겉옷과 반포 속옷과 관과 띠라 그들이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아론으로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할지며

그들의 쓸 것은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이니라

그들이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공교히 짜서 에봇을 짓되

그것에 견대 둘을 달아 그 두 끝을 연하게 하고

에봇 위에 매는 띠는 에봇 짜는 법으로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공교히 붙여 짤지며

호마노 두개를 취하여 그 위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새기되

10 그들의 연치대로 여섯 이름을 한 보석에, 나머지 여섯 이름은 다른 보석에

11 보석을 새기는 자가 인에 새김 같이 너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그 두 보석에 새겨 금테에 물리고

12 그 두 보석을 에봇 두 견대에 붙여 이스라엘 아들들의 기념 보석을 삼되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그 두 어깨에 메어서 기념이 되게 할지며

 

제사장의 옷은 보시다시피 아름답고 화려하고 영화로운 옷입니다. 그 옷은 정확하게 성막과 같은 재료로 같은 순서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지요? 심지어 성막을 지을 때에도 지혜로운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그 일을 시키라고 명령을 하시는 하나님께서 제사장의 옷을 짓는 것도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들, 곧 하나님께서 지혜의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그 일을 시키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제사장은 성막을 입고 있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성막, 즉 성전이라는 것이 무엇을 모형하고 있던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라고 하시면서 당신께서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시지요? 그러니까 성전의 원형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우리 성도들이 성령을 담은 성전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제사장의 옷은 죽어야 할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신 예수를 모형하고 있는 것이고, 그러한 구세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거저 구원을 받아 하나님과 연합된 성도의 천국 현실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사장은 예수를 입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 성전이라고 할 뿐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도 하지요? 그러면 우리 성도는 무엇을 입은 자들이라는 말입니까? 예수를 입은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이 이렇게 기술합니다.

 

(3:27)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13:14)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제사장은 예수를 입고 있는 자들인데 그 예수를 입는다는 것은 하늘 영광을 벗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를 좇아 세상 힘의 옷을 벗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이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는 것이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너무 서둘러서 결론으로 왔는데, 조금만 더 집중을 해 주세요. 제사장의 역할이 뭡니까?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중보자로,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는 의식을 집행하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로운 옷을 벗어야 하는 날이 있습니다. 대 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이스라엘의 대 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지요? 그날에는 대 제사장이 제사장 옷을 다 벗고 지성소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 대제사장의 옷이 어떤 옷이라고 했지요? 영화롭고 아름다운 옷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롭게 아름다운 하늘의 옷을 벗고 이스라엘의 속죄를 위해 벌거벗은 참 대제사장이 저주의 나무에 달려 죽었지요? 그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지성소가 열리고 그 속에, 죽은 흙에 불과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보석으로 자리하게 된 것입니다. 그걸 하나님과의 연합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대 제사장의 옷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어야 하는 죄인들의 현실을 가리키던 성막과 반대로, 하늘의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게 되는 은혜의 구원의 현실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 제사장의 옷이 담고 있던 창세전 언약성취의 내용이 이스라엘의 대 속죄일에 대 제사장의 벌거벗음으로 재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공식이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성막 + 대 제사장의 옷 = 창세전 언약의 성취 모형

 

(9:1-14)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이렇게 해서 대 제사장의 에봇에 그룹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져 버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의 나무에 달리셔서 저주를 받으심으로 생명나무로 향하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성도들을 가리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한다고 했지요? 그 왕 같은 제사장들이 참 제사장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좇아 살게 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역사 속에서 나타나게 되는 그들의 삶이 어떻게 나타나게 될까요? 영화롭고 아름다운 옷을 벗는 형국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이 세상의 힘과 가치와 영광으로 옷을 입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마귀의 세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러한 세상 왕의 옷을 벗고 하늘 왕의 옷으로 갈아입게 되는 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쉽게 말해 육적자아의 야망을 벗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자로 해체되어지고 부인되어지는 것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을 선물 받은 자는 제사장의 에봇과 흉패, 그리고 성막의 지성소와 휘장을 보면서 세상에서의 용사됨과 유명한자 됨, 왕 됨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선물해 주신 은혜의 구원의 현실을 찬송하는 자로 지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에 이스라엘의 왕은 아내를 많이 갖지 말고, 은금을 많이 두지 말며, 말을 많이 갖지 말라고 명기를 해놓은 것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들, 하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힘으로 삼아 살아야 하는 자들이지 이 세상의 것들로 자신들의 안위를 챙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왕이 없음으로 각자 자기 소견대로 사는 자들이 아닌, 하늘 왕의 통치 아래에서 자기를 비워 피조물의 자리로 내려가는 하늘 백성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그것들을 다 어기면서 자신의 왕 됨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에봇은 대 제사장만이 입었던 것이고 그 대 제사장이 금을 모을 수 있었으며, 그 대제사장이 왕을 기름 부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기드온이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금방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기드온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왕으로의 추대를 거절하는 것처럼 위장하면서 스스로를 기름 부어 적법한 절차를 거쳐 이스라엘의 왕이 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 제사장의 옷인 에봇을 금으로 만들어 성막으로 보내지 않고 자기가 거하는 성에 두었던 것입니다. 내가 대 제사장이며, 내가 왕이라는 것입니다. 에봇을 만들어 자기의 성에 둠으로 해서 자신이 제사장 행세를 하여 자기에게 기름을 붓겠다는 속셈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기드온의 이 세상 왕의 자리를 향한 야망이 절정에 달했을 때 아비멜렉이라는 아들이 태어났고 그의 이름이 내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이름으로 지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는 죄의 후손의 모형이었습니다. 그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자기가 왕이 되기 위해 무슨 일을 저지릅니까? 자기 형들 70명을 다 죽여 버립니다. 이게 바로 기드온의 정체임을 아들을 통하여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건 비단 기드온의 추악한 모습 뿐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덮어서 면목 없는 자로 구원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300의 자리는 하나님에 의해 낮은 자리로 밀려 내려가는 성도의 신앙 여정의 실물 예시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죽은 흙으로 폭로 되어져야 하는 성도의 처음 자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우리 성도는 성령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기드온에게 성령이 강림했다는 말은 기드온에게 성령이 옷을 입히셨다는 말이라 했지요? 성령의 옷을 입는다는 말은 자기의 옷, 세상 힘의 옷을 벗는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옷을 입었던 기드온은 135천 명을 한 사람 치듯 쳐서 이겼습니다. 그게 하늘 백성의 승리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이 세상 힘의 상징인 세상 왕이 되기 위해 자기 스스로를 위한 에봇을 지어 입자 그가 망하기 시작했습니다.

 

(8:27)

27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서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니라

 

우리는 참 제사장이신 예수의 뒤를 좇아 영화로운 옷, 아름다운 옷을 벗고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세마포를 입어야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입은 옷은 우리가 보고 좋은 옷이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가 보셔서 좋은 옷이어야 합니다. 엄마가 자기의 취향대로 아이의 옷을 입혀놓고 참 예쁘다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그 옷이 아이의 취향이 아닐 수도 있고, 아이의 입맛에 안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이가 자기의 취향에 맞게 청바지 찢고 자켓 풀어 헤치고 그러면 금방 양아치 되는 겁니다. 우리 아버지가 입혀 주시는 옷이 최고의 옷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아버지가 벗기는 것 벗으시고 아버지가 입혀주시거든 감사하며 입고 계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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